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주유딧 Mar 21. 2017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 한다 _ 제주올레 4코스

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5 

    올레길 4코스는 전 코스 중에서 가장 길고 지루한 길이란다. 23킬로의 거리만도 만만치 않은데 볼거리도 적다, 그러니 시작 지점인 표선 해비치 해변에서부터 토산 산책로까지의 9킬로만 걷고 다음 5코스를 시작하면 하루에 두 코스를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올레길에서 볼거리가 없다는 말을 믿을 수도 없지만, 정말로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관광을 하려고 걷기 여행을 하는 건 아니다.  볼거리는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선물로 감사할 일이며 어디까지나 기호적 취향이다. 누군가는 기기묘묘한 바위를 보고도 무심하지만 누군가는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를 보고도 감동한다. 그러니 볼거리가 없다고 불평할 일은 아니다. 

  긴 길에 대한 지루함보다 문제는 23킬로의 거리다. 지난 세 코스를 무사히 걷긴 했어도 그 코스들은 평균 15킬로였다. 그만큼 걸었다는 것만도 나에겐 대단한 일이다. 사람이 갑자기 많이 걸어도 몸에 이상은 없는 걸까. 탱탱 부은 다리가 그대로 가면 어떡하지. 연골이 약해져 우리 엄마처럼 나이 들어 고생하면. 하여튼 아픈 것보다 걱정이 더 앞섰다. 그러나 어쩌겠나. 걷기 시작했으니 걸어야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리본이 유혹하니 따라갈 수밖에. 일단 걷자. 걷지 못하면 그만 걸으면 된다. 지금은 걸을 수 있다. 그러니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 한다.     

  이렇게 야무진 마음으로 길을 나서는데 날이 좋지 않았다. 하늘이 꾸물거리며 잿빛 구름을 만들어낸다.

  3코스의 종점이자 4코스의 시작점인 표선 해비치 해변에서 오늘의 길이 시작한다. 길은 이내 당케 포구로 들어선다. 당케 포구 어디쯤에 제주 시조인 설문 할망의 당집이 있다. 설문 할망에게 오늘의 길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바닷바람에 누리끼리하게 변색된 흰 등대만 보일 뿐 당케 포구는 끝내 찾지 못했다.

  포구를 지나니 현무암 지대인 갯늪이다. 해안가를 따라 돌담이 죽 이어졌는데 내 눈엔 돌탑처럼 보인다. 땅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돌담에 사뿐히 올려놓았다. 이런 짓도 처음이다. 어지간히 올레길이 특별한가 보다.

  바닷길은 해녀 쉼터 마당 앞으로 지난다. 빨랫줄에는 미끈미끈한 잠수복이 널려있고, 해녀 몇 분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내가 나타나자 대화가 뚝 끊기고 일제히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는데 한 분이 말을 건네신다.

  "올레길 가려고? 여기야. 이쪽으로 가. 요 며칠 날이 안 좋아서 길은 질척거려. 조심히 가."

  제주에 와서 만난 첫 해녀들이다. 먼저 말을 걸어 주고 친절한 길 안내까지 받았다. 나는 마치 어떤 영향력을 가진 어른들에게 응원을 받은 것 같았다. 이 여행이 마냥 순탄하진 않더라도 무탈하게 이어질 거라는 용기가 생겼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만남의 기념으로 빨랫줄에 걸린 잠수복을 사진 찍었더니 크게 웃으신다.


  기분이 날아갈 듯 하니 꾸물거리는 하늘도 괜히 멋지게 보인다. 노란 유채꽃밭을 지나고 도로에 펼쳐놓고 말리는 미역 지대를 조심조심 피해 걷다 깨끗한 풀밭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앞은 바다, 뒤는 나무들로 가려져 혼자서 느긋하게 밥 먹기 좋은 자리였다.

  길은 유채꽃과 갯무꽃이 피어난 해안도로로 끝없이 길게 이어진다. 해안가는 시커먼 돌이 바다를 향해 뻗어 있다. 신이 마구 돌팔매질이라도 한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제멋대로 생긴 돌이다. 잿빛 하늘과 바다, 시커먼 돌밭 풍경은 오컬트적이면서도 추상 조각 같다. 하지만 역시 가도 가도 끝없이 비슷한 풍경만 이어지는 길을 걸으니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올레 4코스를 걸으며




  


  끝 날 것 같지 않은 길이 오름으로 이어졌을 때는 반가울 지경이었다. 나는 단숨에 오름을 올랐다.

  망오름은 울창한 숲의 오름이다. 혼자서 어둑어둑한 오름을 오르면 늘 긴장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즐겁기까지 하다. 야생화 때문에 꽃길을 걷는 착각마저 들었다. 오르막길인데도 힘들지 않으니 내 저질 체력도 조금은 걷기에 적응했나 보다.

  씩씩하게 오름을 오르는데 좁은 산길에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 주춤, 걸음을 멈췄다. 상대도 놀라는 눈치다. 40대 초반의 남성으로 물 빠진 황토색 점퍼를 입었는데 몸에 비해 옷이 크다. 헐렁한 점퍼 주머니엔 '올레 여행'이라고 쓰인 브로셔가 살짝 삐져나왔다. 드디어 올레길에서 올레꾼을 만났다. 나는 마음이 놓였는데 남자는 어쩐지 허둥대는 기색이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야생화를 유심히 보는 척한다. 내가 꼼짝을 않자 남자는 더욱더 몸을 낮추고 식물 조사라도 나온 사람처럼 풀잎을 이리저리 들춰본다. 내가 먼저 지나가라는 신호인가.

  남자가 딴 짓(?)을 하는 척하며 길을 비켜주자 나는 남자 곁을 후다닥 지나서 한걸음에 망오름 정상까지 올라갔다. 오름 하나 오르는 일이 누워 떡먹기보다 쉬워진 게 이때부터다. 정상에는 반듯한 전망대가 있어서 그 위에 올라 정상 풍경을 만끽하며 귤을 까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히 그 남자는 날 보고 놀랬다. 내가 왜? 나는 올레길을 걷기 위해 평생 길러오던 긴 생머리를 단발로 치고 옷도 밝은 주황색을 입고 입술에 빨간 립스틱커녕 비비크림만 발랐는데 이런 날 보고 대체 왜 놀란 걸까.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느닷없이 누군가를 만나면 남자들도 무서운가 보다. 슬며시 웃음이 났다. 남자가 날 보고 놀란 걸 생각하니 내가 더 센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의 올레길도 걱정할 필요 없겠다.

  남자가 올라온다. 여전히 내가 보이지 않는 척하며 두리번거리고 수첩에 뭔가를 적는다. 내가 있는 정상 근처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아는 척을 하면 귤 하나는 나눠드릴 텐데. 그때 갑자기 비가 내렸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제주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서 배낭에 늘 우비를 챙겨 넣고 다닌다. 남자의 표정은 낭패로 가득하다. 우비 가지고 다니라고 올레 가이드 책자에도 나와 있는데 나보다 더 걷기 여행 초짜 구만. 나는 남자를 남겨두고 먼저 오름을 내려갔다.

  숲은 점점 어두워졌다. 거의 다 내려왔다고 생각할 즈음 시멘트로 만든 구조물이 나타났다. 안을 살짝 들여다보니 물이 고여있고 주위엔 바가지가 놓여 있다. 샘터다. 샘터 앞에는 이끼 낀 나무들로 둘러싸인 물웅덩이가 있다. 물은 늪처럼 걸쭉하고 끈적끈적해 보였다. 웅덩이 앞에는 나무 둥치가 있는데 위에는 민속촌에서나 볼만한 물허벅 항아리가 놓여있다.



망오름을 내려와서, 올레 4코스를 걸으며







  그런데 그곳에 남자가 있는 게 아닌가. 남자는 물허벅 항아리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분명히 내가 먼저 내려왔는데 어째서 남자가 여기에 있는 걸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떼 지지 않는 다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뒤도 안 돌아보고 정신없이 오름을 내려갔다. 오름을 벗어나자마자 비가 멈추고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인데 이번에는 특이한 절이 눈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기와지붕과 노란 벽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절 입구에는 아치형의 돌다리가 있고 돌다리 아래는 암녹색 연못이다. 연못가에는 수선화가 피었고 잉어 떼들이 꽃잎처럼 떠다닌다. 맑은 하늘에 둥싱 떠있는 절은 조금 전의 늪처럼 보이는 물웅덩이가 있던 숲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영천사, 올레 4코스를 걸으며


  


  십 여 킬로를 넘게 걸어왔고 여러 번 놀랐던 터라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절에서 잠깐 신세를 질 수 있을까 하여 돌다리를 건너 계단을 올라갔다. 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이라도 찾으려고 구석구석을 돌아다녀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화장실은 포기하고 절을 나섰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순간 남자가 떠올랐다. 남자를 마지막으로 본 건 물웅덩이가 있던 숲이었다. 남자는 결국 올레길을 포기했나 보다. 비와 나, 때문에?


  절을 지나자 길은 다시 해안도로로 이어진다. 하늘은 잔뜩 흐리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길은 끝날 줄 모른다. 바다의 시커먼 돌은 비에 젖어 을씨년스럽다. 바닷가로 내려가 돌길을 걷고 갯늪을 지나 마을을 지나는 동안 머릿속에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비를 맞으며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서 터덜터덜 걷다 보면 내가 지금 이 길을 왜 걷는지 이것이 여행인지 고행인지 투덜댈 법도 한데 나는 마치 걷기 한풀이를 하듯 오로지 걷는 일에만 집중했다.

  드디어 23킬로의 길이 끝나 종점에 도착했다. 우비를 벗어 간세에게 씌어주었다. 지난 코스들에서는 종점에 도착하면 적잖은 감동에 젖곤 했다. 길을 다 걸은 내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그런데 오늘은 담담하기만 하다. 가장 길고 지루한 길을 건너뛰지 않고 다 걸었으니 뛸 듯이 기뻐할 만도 한데 어째서 담담하기만 한 걸까.

  감사하다. 그저 감사하다. 이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어서. 길을 걸을 수 있는 체력과 시간이 주어져서. 몇 번 놀랄 일은 있었지만 결국 무탈하게 여기까지 올 수 있어서. 제주에 내려와서. 올레길 여행을 할 수 있어서. 나는 감사하다.

  내가 여행에서 무엇을 바랐는지 이제 알 것 같다. 나는 걷고 싶었던 거다. 끝없이 길고 긴 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었던 거다. 지루하든 길든 나는 다 좋다. 그저 걸을 수만 있다면.

  나는 안다. 인생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고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이것이 이 여행에서 내가 바라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람에 리본이 날린다 _ 제주올레 3코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