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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유딧 Mar 24. 2017

걷고 그리다 _ 제주올레 6코스

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7

  태곳적 신비를 담고 있는 쇠소깍을 처음 보았을 때 놀라운 비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효돈천 하구에 자리한 쇠소깍은 현무암 지대의 땅 밑을 흐르는 물과 바닷물이 만나 이루어진 웅덩이다. 호수처럼 고인 민물은 바닥까지 고스란히 보이는 맑은 쪽빛이다. 울창한 원시림과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감싸 안으며 고운 물빛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쇠소깍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쪽빛 민물과 푸른 바다가 만나는 셈이다. 신비롭고 오묘한 쇠소깍은 문화재 명승지로 지정되어 방송을 타는 등 매우 유명해져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쇠소깍, 올레 6코스를 걸으며





  쇠소깍은 나에게 매우 의미 깊은 장소다.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된 곳이랄까. 지난해 9월, 제주 여행 중에 있었던 일이다. J와 나는 쇠소깍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웬 중년 여성이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까무잡잡하게 탄 얼굴과 작은 체구가 다부져 보였다. 미소를 지으며 자청해서 사진을 찍어준다니 처음엔 관광지 사진사인 줄 알고 사양하려 했다.

  "두 분이 좋아 보여서 그래요. 카메라 이리 줘 봐요."

  우리가 얼마나 좋은 티를 냈으면.


  혼자 오셨어요?

  왜 혼자 여행하세요?

  그때까지 나는 혼자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성 혼자 다니는 여행에 대해선 의문과 편견마저 가지고 있었다. 비행기 타고 와야 하는 제주를 혼자 여행하는 중년 여성이 나는 정말 의아하고 궁금했다. 나의 질문이 순수한 의문인 줄 간파했는지 그분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족은 서울에 있고 본인은 제주가 좋아서 일 년 살기로 내려왔다고 한다. 서귀포에 한 칸 짜리 방 하나 얻고 낮엔 여행을 다니고 저녁엔 아르바이트로 소일거리 하면서 살고 있다.

  "올레길 걸어봤어요? 올레길 걷다 보면 제주의 오래된 마을을 많이 지나는데 돌담 사이를 걸으면 바람이 졸졸 쫓아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눈빛이 반짝였나 보다. J가 약간 불안해하더니 여행 내내 그분에 대해 말한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제주 여행을 한다고? 그게 뭐냐. 그리고 무슨 재미로 혼자 여행을 다녀. 말이 안 돼."

  바람이 쫒아온다잖아.

  "바람? 바람은 어디나 불어."

  J의 우려는 적중했다. 그 여행길에서 나는 제주에서 살 결심을 했다. 누군가는 나를 즉흥적이고 극단적이라 하겠지만 어쩌면 나는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꿈 하나를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평생 이방인처럼 살고 있다. 어디에서도 정착할 마음 없이 떠날 준비를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반쯤은 타협했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늘 제주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품어 왔다. 하지만 그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뜬구름 같은 로망일 뿐이었다.

  제주는 원주민만 살고 있는 관광지로 알고 있었다. 평범한 육지 사람이 내려와 먹고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만일 나에게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는 자유와 선택이 주어진다면 우리나라에선 제주다. 살고 싶은 곳이 분명히 있는데 왜 살기 싫은 곳에서 살아야 하나. 직업과 사람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간절한 게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있을까.

  5개월 후 우리는 제주에 이주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혼자 여행을 하며 그분을 만났던 쇠소깍에 와있다. 앞일은 정말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제주 도민이 될 줄이야. 내가 이렇게 혼자 여행을 할 줄은 5개월 전에는 상상도 못 하였다. 이쯤 되면 그 분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 아닐까.


  지난주에 올레길 네 개의 코스를 걸었더니 무릎이 붓고 발목이 시큰거린다. 누웠다 일어날 때마다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 며칠 쉬며 컨디션 회복을 했는데 이번 주는 내내 비가 내린다. 우비를 입고 걸으면 되겠지. 올레길에서 비를 만난 적은 있어도 비 내리는 날 집을 나선 건 처음이다. 걷기 중독에 단단히 빠져버렸다.

  6코스 시작점 쇠소깍에 도착하니 비로 인해 평소보다 사람들이 적다. 쇠소깍 앞 도넛 가게도 한산하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출발했다.

  바닷가 게우 코지에 있는 생이돌은 새똥으로 하얗게 변색되었다. 생이는 제주어로 새를 뜻하는데 새들이 머물다 가는 돌이라 생이돌이라 한다. 내 눈엔 입을 쫙 벌리고 굳어버린 괴생물체로 보인다. 날이 으스스하니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흐른다.  

  제지기 오름에 올라 정상에 서니 서귀포 마을과 화가 이중섭이 사랑한 섶섬이 보인다. 해무에 쌓인 섶섬은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다. 빗줄기가 점점 세져 오름을 내려갔다. 길에서 다시 섶섬을 만났다. 노란 유채꽃 너머 보이는 섶섬은 그대로 봄날의 엽서다.

  섭섬을 지나니 소천지다. 백두산 천지를 닮았다 하여 소천지라 불린다. 우후죽순 솟은 돌이 둥그렇게 담을 두르고 안에는 맑은 바닷물이 고여 있다. 날이 좋으면 저 멀리 있는 한라산이 물에 비친다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한라산은 보이지 않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미끄러운 돌을 조심조심 밟고 다가갔다. 소천지는 정말로 경이롭다. 우주적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소천지를 오래 감상하고 싶어 인근의 정자에 앉으니 마침 비가 그쳐 도시락을 먹었다.


  소천지에서 시간을 너무 오래 보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간사할 수가. 소천지에 흠뻑 취했던 나는 소정방 폭포를 보고는 또 한 번 놀랐다. 야자수가 있는 조성이 잘 된 공원을 지나면 올레 사무국이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우렁찬 폭포 소리가 들린다. 사무국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면 소정방 폭포를 만날 수 있다. 폭포는 몇 줄기로 시원스럽게 쏟아져내려 바다로 흘러간다. 소정방 폭포가 특히 멋진 이유는 소리 때문이다. 돌멩이가 깔린 해안가에는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쏴쏴 쏟아지는 폭포와 돌멩이를 쓸어내리는 파도의 웅장한 하모니는 듣는 이의 가슴을 쿵쿵 울린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해안가의 벼랑 그늘에 앉았다. 그런데 갯강구가 너무 많다. 고생대 생물 갯강구는 아무리 자주 봐도 정을 줄 수가 없다. 눈앞의 어마 무시한 풍경을 그려서 즐거운데 갯강구가 내 몸을 타고 올라올까 봐 겁이 난다. 밖에서 그릴 때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빨리 그릴 수밖에 없지만 이럴 땐 정말 초스피드로 그림이 끝난다.


 




소정방 폭포, 올레 6코스를 걸으며



  소정방 폭포를 그리는 동안 문득문득 시선을 낚아챈 건 갯강구만이 아니다. 바다에 집이 한 채 떠있다. 오두막집 같기도 한데 대체 왜 바다 한가운데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바다 한가운데 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오두막집은 아니고 아파트이긴 했는데 어느 날 파도가 솟구치더니 우리 집 천장을 뚫고 물줄기가 들어오는 꿈이었다. 천장은 비탈진 유리로 되어 있고 나는 꼭대기 층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 집 아래층부터는 바다에 잠겨있는 황당무계한 꿈이었지만 그때부터 나는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저 오두막집도 그리고 싶은데 갯강구 때문에 더 앉아 있을 수 없어 맞은편으로 옮겨 앉았다. 흐린 날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오막살이 집 한 채는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지 못할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노래가 절로 나온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소정방 폭포 앞 바다, 올레 6코스를 걸으며



  여행 중에 그림 그리기가 참 좋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때의 여행은 늘 아쉽기만 했다. 여행의 끝은 충만함으로 가득해야 하는데 안타까움이 더 컸다. 언제 또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수없이 많은 사진을 남기고 기념품을 사도 어쩔 수 없는 허무. 여행 중에 그림을 그리면서부터는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면 마치 그 시간과 공간을 붙들어 내 것으로 만든 것만 같다. 온 마음과 감각을 통해 들어온 그곳의 시간들, 생각들은 내 스케치북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날 수 있다.

  그림을 다 그린 후 자리를 털고 일어서 계단을 오르는데 관광객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살짝 웃는다. 아... 클레멘타인. 노래를 너무 크게 불렀나 보다. 폭포와 파도 때문에 내 노랫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줄행랑을 치듯 그곳을 서둘러 떠났다.


  올레 6코스는 특이하게 어느 지점부터 A와 B코스로 나뉘는데 둘 중 하나만 선택해서 걸어야 한다. A냐 B냐, 나는 두 개의 코스를 놓고 오랫동안 행복한 고민을 했다. 소천지와 소정방 폭포의 여운을 안고 걷다 보니 어느새 A와 B코스 갈림길까지 왔다. 전날 잠들기 전까지 고민을 했음에도 막상 앞에 서니 도무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새로 단장한 이중섭 문화 거리가 들어 있는 A코스는 사람들이 많으니 한적한 B코스를 걷자, 했다가 비가 오니 자연이 좋은 B코스는 나중에 걷기로 했다. 이중섭 문화 거리, 올레시장, 천지연 폭포로 이어지는 길이 A코스다. 그런데 한참을 걷다 보니 B코스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나오는 게 아닌가.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내가 대체 어느 코스를  걸었는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연교 앞이었다. B코스를 선택한다면 새연교를 건너 새섬을 한 바퀴 돌고 가려했는데 벌써 5시가 넘었다. 소천지와 소정방 폭포에서 너무 오래 있었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비는 점점 더 내리니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부지런히 걸어갈 수밖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비 내리는 저녁의 길을 터덜터덜 걸어 잔디 깔린 넓은 공원을 가로질러 갔다. 아무도 없는 안개 자욱한 공원을 걸으니 무섭기도 쓸쓸하기도 했다. 나뭇가지에 묶인 올레 리본조차 괴상한 장소로 나를 유인할 것만 같았다. 안개는 점점 더 짙어져 몇 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 길은 숲으로 들어서더니 삼매봉으로 이어진다. 정상에 올랐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발길을 돌려 내려가려 하자 누군가 올라오고 있다. 비 오는 날 굳이 오름에 오르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뛰다시피 하여 삼매봉을 내려갔다. 마지막 기운을 짜 드디어 외돌개가 있는 6코스 종점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 그랬을 거다. 내가 길을 헤맨 건 소천지와 폭포에 홀린 탓도 있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훌쩍 넘기고 비까지 내리는 저녁 무렵이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A와 B를 놓고 그토록 기대하며 고민을 했는데 길은 나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갔다. 스산하고 쓸쓸한 길이었다. 안갯속을 걸어가는 기억만 남아있다.

  제주에서 평생 살기로 하고 내려온 선택은 잘 한 것일까. 안개로 가득했던 드넓은 공원과 삼매봉 정상 풍경처럼 내가 내린 선택들의 앞날은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어쩌면 선택이란 내 의지가 아닐 수 있다. 내가 어느 것을 선택하든 길이 제 멋대로 나를 데려가듯 내 미래도 정해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운명인가. 나는 미리 정해진 운명대로 하나씩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최선은 받아들이기. 좋거나 나쁘거나 다 받아들이기. 

  하여튼 지금 나는 제주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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