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매개로 하는 어떤 치유
내 동생에게
안녕? 잘 지내?
사실 너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 너는 읽지 못하니까. 아니 읽을 수 있었는데 우리가 지레 못 읽는다고, 아니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읽을 수 있냐고 네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갑작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나는 고통받아도 되지만, 너만큼은 잘 지냈으면 좋겠어. 그냥 이 마음이 흘러넘쳐서 이 말을 너무 하고 싶었어. 언제나 그렇듯 나는 참 네게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지?
갑자기 네게 편지를 쓰는 건 내가 우울하기 때문이야. 너에게 쓰는 첫 편지부터 잠 주제가 울적하다. 그지?
돌아보면 나는 항상 우울했고, 우울했는지 그냥 그랬는지 할 때도 있었지. 그리고 나 말고도 모든 사람이 우울하거나 우울하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을 거야.
나는 항상 우울했지만, 좀 더 깊은 우울함에 빠질 때면 이유를 찾아내 얕은 우울로 떠오르는 생활을 자주 했어. 엄마도 아빠도 모르게. 너는 알지 모르겠지만, 엄마나 아빠는 나를 과보호해. 그 이유를 너는 모르겠지만.
근데 2022년 1월인가 2월부터 굉장히 우울했어. 생각해 보니까 <내일 독립합니다>를 한창 마감하고 있을 때니까 1월부터였던 것 같네. 1월부터 집도 치우지 않았고 약속도 자주 취소하고 엄청나게 우울했지.
2월에는 새로운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나의 우울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우울함이 백중사리처럼 차올랐지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바닷물에 머리만 겨우 뿅! 내놓고 밭은 숨을 몰아쉬며 지냈어. 근데 결국 8월 말에 결국 머리까지 가라앉아 버리더라고.
그러다가 2023년 2월 깊은 우울이 딱 1년이 되는 날, 굉장한 우울이 또 나를 집어삼켰어. 사무실에 며칠간 아침에 연차를 연속으로 통보했어. 근데 그러다 문득 부엌에서 '이렇게 삶이 그냥 망가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날 바로 정신의학과를 예약했어. 내가 정신의학과 의사들하고 관계 형성(라포르 형성)이 안되서 '나는 그냥 약을 받으러 가는 거다'라고만 생각하며 병원을 예약했어. 관계 형성이고 나발이고 나에게 약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정신의학과 의사뿐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병원 후기에 '약 처방을 잘해준다'는 곳으로 예약했어.
너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작년에 우울함이 내 머리까지 삼켰을 때 1달 동안 산속으로 요양하러 갔고, 심리상담을 시작했어. 주변의 도움으로 6개월 동안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어. 근데 하루에 두 번 발생하는 조수간만의 차 같이, 자연의 순리에 맞게 무릎, 배꼽, 어깨, 목, 그리고 머리까지 물이 서서히 차오르다 백중사리가 온 것처럼 서서히 그러나 너무나 갑작스럽고 깊이 우울이 나를 집어삼켰어. 마치 서래를 삼킨 바닷물처럼.
*백중사리는 1년에 몇 번 없는 대자연의 이벤트야. 지구는 달의 인력의 영향을 받아 바닷물이 차오르고 빠져나가는 밀물과 썰물― 이걸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조수간만의 차'라는 게 발생해. 지구가 자전하면서 달의 끌어당김 힘을 받는 지점들이 차이가 나서 어느 시간대에는 갯벌이 쫘악 드러나게 물이 빠지고, 어느 시간대에는 육지 가까이 바닷물이 가득 차. 이런 시간대를 '물때'라고 부르는데 사실 몇십 년 치가 정해져 있어. 어느 시기에 달과 더 가까워지면 보통보다 바닷물이 더 많이 차올라. 그걸 물이 조금 찰 때는 선조금, 앉은조금이라고 말하고, 물이 많이(사리) 찰 때 무릎사리, 배꼽사리, 어깨사리라고 말하고 그 중 정말 가끔 머리 넘어 많이 찰 때는 '백중사리'라고 해
**서래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이야
너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은 심리상담 8개월째, 정신의학과 약물치료 2개월 째야.
그동안 아주 우울했지만, 아마 이렇게 우울한 건 별로 없었던 것 같아. 아닌가? 옛날에도 이만큼 우울했지만, 이제 나는 옛날만큼 에너지가 없어서, 몸도 정신도 낡아가서 우울을 못 견뎌서 우울에 잠식되어 버린 걸까? 잘 모르겠어.
정신의학과에서 처방한 약물을 먹으면서 그래도 조금 일상을 찾을 수 있었어. 일단 어느 날 우울이 밀물처럼 몰려와도, 밀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한 연차를 내지 않게 되었어. 가끔 넘어질 때도 있는데 일어날지 말지 조금 고민하긴 해. 근데 신기하게도 대부분 '일어난다'는 선택을 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나는 앞으로 나태지옥에 가서도 누워있을 사람인데. 이게 약물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심리상담을 받고 있지만 약물치료를 받겠다고 결심한 건, 이제 더 이상 내 의지만으로 내 몸과 마음을 콘트롤할 수 없기 때문이었어. 아까도 말했지만, '이렇게 삶이 망가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내 삶이 망가지고 있었어. 내 삶을 내가 조종/조정할 수 없고, 나의 모든 것들이 해변의 고운 모래처럼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모래시계처럼 모든 게 비정형화 되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거든.
네 덕분인지, 아니면 그냥 내 성정에 따라 그간 행동거지를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백중사리에 가라앉았을 때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었어. 그래서 지금 넘어져도 일어난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 같기도 해.
약물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보니 요즘 술도 안마셔. 너는 술을 마셔봤니? 네가 술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우리 집안 사람이라면 술을 좋아했을 것 같은데. 너는 엄마를 닮아서 나와 다르게 아마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매우 좋아했을 거야.
사실 약물 치료한다고 금주를 해야 하는 건 아니야. 정신의학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나마 하나 칭찬(?) 받은 게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였거든. 사실 나 술 엄청 많이 마시는데, 최근에 마시지 않을 뿐이었거든. 그냥 그래서 요즘 술을 안마셔. 그나마 내 생활에서 유일하게 나를 우울하게 하지 않는 게 술을 적게 마시는 거였으니까.
그리고 매주 적지 않은 진료비와 약제비가 들어. 한번 가면 19,000원에서 23,000원 정도 드니까 이왕 돈을 쓸 거면 의사가 제안한 대로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약을 꾸준히 먹어서 1년 후에는 약을 조금씩 줄어보는 게 내 통장에도 도움이 되겠더라고.
약물을 복용한다고 해서 사실 엄청나게 우울증이 호전되지는 않아. 아까 말한 것처럼 그냥 넘어지면, 일어난다 정도의 선택을 하게 되는 정도인 것 같아. 나 같은 경우는 기분이 상향되는 게 아니고 우울하지도 않고, 기분이 좋지도 않아. 내 기분은 항상 심정지 그래프처럼 ―――――――――――――――――――――
이런 모양이야. 그래서 안 그래도 로봇 같은데 요즘 내가 자꾸 로봇 같아. 근데 우울증에 걸린 거지. 고릿짝적 SF소설 소재처럼 말이야.
내년에는 약을 점점 줄여갈 수 있겠지? 나는 부디 그랬으면 좋겠어. 아침, 저녁으로 약을 먹는 게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더라고.
어제인가, 그제 네가 꿈에 나왔어. 꿈을 잘 안 꾸는 내가 요즘 꿈을 꾸는 건 약의 부작용 때문이라서 긍정적인 꿈은 하나도 없어. 어제 네가 나온 꿈도 내용은 굉장히 부정적이었는데 그래도 네가 나와서 나에게는 정말 오랜만에 꾼 긍정적인 꿈이었어.
2023년 4월 22일 지구의 날
누나가
추신: 원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추신을 남긴대. 아마 본문에서도 다 담지 못해 흘러넘치는 마음이 있어서, 꾹꾹 눌러 담았음에도 꼭 써야 하는 한 줄 정도가 또 있었기 때문이겠지? 너에게 보내는 첫 편지에 첫 추신은 이 말밖에 생각나지 않아― 네가 그립고 너무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