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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Apr 25. 2023

그 비행기 안에서

치앙마이에서 한달을 살아봤더니 1

기나긴 코로나 시국을 지나 무려 3년 만에 해외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목적지는 13년 전, 우리의 신혼여행지이기도 했던 치앙마이. 너무 오랜만의 비행이라 떨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에 끼어 기내에 들어섰을 때 마냥 행복한 시간만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스스로 촉이 좋은 편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포식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위험을 감지하는, 그러니까 초식동물 수준의 감각은 소유한 편이다. 그 노인이 우리 라인에 앉으며 빠르게 주위를 훑고, 이 정도 비행은 익숙하다는 듯 바쁜 승무원들과 천연덕스럽게 스몰토킹을 시도할 때부터 나는 느꼈다. 위험한 사람이다. 얽혀서 좋을 게 없다. 

태국 치앙마이와 인천을 오가는 제주항공은 3-3 좌석 구조의 소형 기종이었는데, 그동안 내가 타본 어떤 항공기보다 간격이 좁았다. 그러니까 복도에서 두 사람이 지나칠 때 아무리 바짝 비켜서도 엉덩이가 스칠 수밖에 없는 협소함이랄까. 앞뒤 간격도 다닥다닥 붙여놓아서 아예 등받이를 조정할 수 없게 고정시켜 놓았다. 그래도 편도 20만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티켓을 구했으므로 이만한 불편은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의 설렘 속에 충분히 희석되고도 남았다. 

문제는 그 좁은 간격을 사이에 두고 옆자리에 앉은 노인이었다. 안쪽에 앉은 우리가 화장실을 가려면 바깥쪽에 앉은 노인이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는데, 흔쾌히 양보를 해주며 인사를 튼 게 계기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때가 바로 어마어마한 말 폭탄이 투하된 순간이었다. 아니, 폭탄이라기보다는 기관총 난사가 시작됐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처음 대화의 시작은 사실 흥미로웠다. 치앙마이에 얼마나 있냐. (“한 달 살기 하러 가요”) 나는 몇 달 살러 간다. 치앙마이에 집도 있고 차도 있기 때문에, 매년 두 번씩 골프 치러 간다. 한국에선 어디 사냐. (“일산 사는데요”) 나도 일산에 산다. 나는 일산에서 33년을 살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춥고 골프가 비싸기 때문에 살기 좋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산다. 누구나 꿈꾸는 노후생활을 줄줄 읊어대고 있으니 절로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나는 호기심이 생기면 질문을 한다. 그러나 내 질문은 전혀 먹혀들지가 않았다. 이런 일방적인 대화는 사회초년생 때 아니 기자 시절 자기 할 말만 세 시간씩 읊어대는 인터뷰이를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이라 신선한 충격이었다. 

현재의 삶에 대해 만족할 만큼 자랑을 늘어놓았는지 노인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로 한 것 같았다. 7080도 아니고 무려 60년대로 돌아가 자랑 레퍼토리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몇 살로 보이냐. (잘 모르겠고 그냥 노인으로 보이는데- “육십대?” -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칠십육세다. (당연하지만 우리는 묻지 않았다) 내가 66학번이다. 연대 경영학과를 나온 사람이다. 내 부인은 이대 성악과를 나왔고, 장모도 이대를 나왔다. 같은 연대 경영학과 출신으로는 블라블라. 

아, 중간에 우리 나이와 학벌 체킹도 마쳤다. 명지대라고 하니 아, 그래? 하더니 싱겁다는 듯이 바로 다음 레퍼토리로 넘어갔다. 나이도 묻더니 건성으로 음, 그 나이로 보이네 하고는 다음 레퍼토리로. 와……. 뭐 이런 화딱지 나는 화법이 다 있나. 우리는 완전 젊어 보이시네요, 어쩌구 하며 맘에도 없는 리액션을 돈도 안 받고 해줬는데 말이다. 나는 사실 이 때부터 귀를 닫았다. 아니, 학벌 자랑이라니, 고리타분함의 최전선을 찍은 셈이 아닌가. 비행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안타깝지만 안 들리는 척하기에 자리 간격은 매우 좁았고, 다른 곳으로 피하거나 시선을 둘 데도 없는 협소한 비행기 안이었다. 저가항공답게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스크린도 물론 없었다. 노인도 어쩌면 단순히 심심하단 이유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라도 상도가 있는 법인데! 

가장 안쪽에 앉은 덕분에 나는 슬쩍 자는 척도 하고, 독서를 하는 척 하며 집중포화에서 비껴났다. 무한 레퍼토리를 쏟아내는 와중에도 가끔씩 “이렇게 어두운 데서 책을 보면 눈이 금방 망가진다. 건강은 젊을 때 지켜야지”하고 되도 않은 훈계를 하며 나를 대화에 끌어들이려 애썼지만, 끈질기게 안 들리는 척 했다.(안 들릴 리가 있나. 그렇게 좁은 비행기 안에서) 안타깝게도 나의 남편만이 희생양이 되었다. 나름대로 남편을 구제해주기 위해 이따금씩 다른 말과 행동으로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남편은 쉼 없이 쏟아지는 집중포화를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는지 내 말엔 대꾸도 하지 못했다. 노인의 이야기는 과거 자랑에서 다시 현재 자랑, 휴대폰 속 저장된 사진까지 보여주며 자신이 외국어를 참 잘해서 외국인들과도 얼마나 잘 어우러지고, 과거에 사업을 많이 해서 세계정세도 얼마나 잘 보는지, 레퍼토리가 확장되어가고 있었다. 착한 남편은 중간 중간 자기 얘기도 던졌지만 다 튕겨나가고, 이제는 “네, 네”만 연발하고 있었다. 미안했지만 둘이 고통 받는 것보단 한 사람이 받는 게 낫지, 나는 다시 창밖의 검은 창공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스무 살 때 처음 유럽 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프랑스 노인이 생각났다. 그 때 나는 알을 갓 깨고 나온 병아리와 같았다.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난 외국인에게 서툰 영어로 이것이 나의 첫 유럽여행이며 이것도 볼 거고 저것도 할 거고 반짝이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 때 그 노인도 동남아를 오가며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해줬는데, 거기에 자기 삶을 과시하는 내용은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참 근사해 보이는 분이었다. 천박한 한국 할아버지들에게 익숙해 있다가 유럽 노인을 처음 만나본 나에겐 그의 존재 자체가 문화충격에 가까웠다. ‘유럽의 젠틀맨이란 이런 분을 이야기하는 거겠지’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백발에 잘 정돈된 수염, 중절모에 단정한 수트 차림이라 그랬을까. 아니 그보다는 행동거지와 태도에 드러나는 품위가 있었다. 옆 자리에 넘어가지 않게 신문을 작게 접어서 보는 정제된 손놀림이라든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와인을 요청해 천천히 홀짝이는 모습까지. 우아한 백조나 품격 있는 단정학을 연상케 하는 노인이었고, 나 또한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 생각했다. 프랑스 노인은 파리의 갈만한 곳, 추천할만한 곳을 여러 군데 알려주었고, 아시아라는 알을 막 깨고 나온 병아리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해주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친구가 차를 가지고 공항 픽업을 나와주기로 했으니 괜찮다면 내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철없는 병아리였던 나는 백조의 친절을 냉큼 받았다. 백조는 끝까지 안전하게 숙소에 데려다줬을 뿐 아니라 가방까지 다 들어다주고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전화번호까지 적어주고 떠났다. 그 짧은 만남만으로도 그렇게 그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노인’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갑자기 불이 켜지고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장의 서툰 영어발음마저도 이 고역에서 벗어나게 해줄 동앗줄 같아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한참을 혼자 떠들던 노인은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남편에게 “자식도 안 들어주는 얘기를 이렇게 오래 들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는 뭔가 억울한 느낌이 들어서 “치앙마이에서 그렇게 오래 계셨는데,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맛집 같은 거 있음 좀 알려 주세요” 하고 질문을 던졌지만 아주 짧고 쿨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건 네이버에 치면 다 나와.”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떠나면서도 자기는 차를 가지고 데리러 오는 친구가 있다며 끝까지 자랑을 빼먹지 않았다. (당연히 우리는 묻지 않았지만) 태국어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라인톡 대화창을 열어 보여주기까지 했다. 우리 숙소는 시내 쪽이라 하니 “아, 거기는 공기 안 좋고 관광객들 많은 싼 동네고 난 높은 데 살지”라는 자랑도. 우리 숙소는 공항에서 10분밖에 안 걸리는 곳이었지만 노인은 예의상으로라도 태워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지자랑 폭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우리로서도 사양이었지만. 


캄캄한 치앙마이 공항 주차장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며, 우리는 겨우 살아남은 서바이버의 심정으로 서로에게 기댔다. 한밤중임에도 후덥지근한 동남아의 열기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만날 일 없는,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4시간 가까이 일방적으로 자기자랑만 늘어놓는 꼰대의 심리는 대체 무엇일까.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워서 어디든 토해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런 마음일까. 그걸 들은 사람이 설마 진심으로 ‘와 정말 멋진 사람이다. 나 저런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느낄 거라 생각하나. 자기 입으로 자기 자랑을 하면 되게 없어 보인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어떤 인생이든 빛과 어둠이 있고, 이 단편적인 만남에서 본인이 어필하고 싶은 부분만 보여줬을 거라 생각하기에 당연히 그걸로 전체를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수십 년을 주류계층으로만 살아온 한국 남성의 흔하디흔한 소통방식이기에 딱히 놀랍거나 대단한 봉변을 당했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본인은 스스로 글로벌하고 깨어있으며, 젊은 사람들과 굉장히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지만.


앱으로 호출한 콜택시가 도착했다. 예전에 동남아에서 택시를 타면, 꼭 택시기사가 어느 나라에서 왔냐, 누구누구 아냐 하며 말을 걸곤 했는데, 요즘 택시기사들은 인사만 할뿐 손님에게 필요이상의 말을 걸지 않는다. 편안하다.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이제 복잡한 생각을 접기로 한다. 결론은 하나이지 않은가. 으이구, 난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글 홍아미

여행 에세이스트. 아미가출판사 대표. <제주는 숲과 바다> <그래서 너에게로 갔어> <미치도록 떠나고 싶어서> <지금, 우리, 남미>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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