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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묭 May 23. 2018

말 이상의 말

안규철과 정서영

 재작년 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2015.9.15~2016.5.22)전에서 안규철의 작품을 처음 보았는데, 전시를 보다가 울어 버렸다. 다녀와서 일기에, "내가 안규철의 이번 전시를 좋아하게 된 건 어쩌면 이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시대정신>(2013.11.12~2014.4.27)에서 이우환의 작품을 실견하고 불현듯 좋아하게 되었던 일과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른다"라고 썼었다. 지금 다시 미술사 맥락 짚어보니까 이우환 작품 자체는 단색화라는 맥락 속에서, 즉 미술 헤게모니 아래에서 지위를 획득한 '가진 자들의 미술'이었다. 작품 미술 권력의 중점이 되었다는 것. 물론 모든 아방가르드적 작품은 최종적으로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유행하게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러나 안규철은 현실과 발언 하에서 현실의 부정에 눈 감는 예술에 대한 반대로서 나온 작품들을 하기에 이우환과 다른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했다. 그렇지만 <당신만을 위한 말>(2017.2.21~2017.4.16, 국제 갤러리)을 보고 와서는 역시 완벽하게 권력에서 멀리 있는 미술이란 게 정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감정은 굉장히 낯설지만 한편으로 익숙하기도 한 감정이다(아마 스스로를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발언 역시 일종의 정치 발언인 것처럼)


안규철, <달을 그리는 법>, 2017, 캔버스에 유채.1)


 전시 가서 이 그림 앞에 앉아서 울어 버렸다. 사실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작품 제목을 다른 것과 착각해서 이 작품을 <당신만을 위한 말>이라고 봤다. 그 제목으로 생각하며 작품을 봤더니 그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생각해 봐. 이 작품의 제목이 그거였다면 내가 말할 때마다 그리고 그걸 당신이 들을 때마다 위상이 달라지고 마는 그 말들의 무게를, 생각해 봐. 그랬더니 중압감에 자꾸 눈물 났다. 나중에 제목이 '달을 그리는 법'인 걸 확인했는데 좋다는 느낌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달을 그리는 많은 법이 있고 당신은 그저 '당신만을 위한 말'을 찾아, 그 중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야. "어디로도 갈 수 없고, 무엇도 될 수 없고, 아무에게도 의미가 될 수 없는" 것, "인생에서 빠져도 아무 지장이 없는 예술"2) 그러니 그저 당신만을 위한 당신에게만 의미가 되는 것을 찾으면 되는 거야. 그런 달을 그리는 법.


 안규철이 작품을 할 때 접근하는 방식이 어떤 의미에서는 소위 꼰대스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위의 작품이 주는 느낌도 마찬가지이고) 접근 방식이 그렇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런 작품을 할 수 있는 게 이미 이 사람이 권력적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그 앞에서 안도하고 만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정서영이 하려는 방향과도 닮았다. 그러나 둘이 다른 느낌을 주는 건 이런 차원일 텐데, 안규철 작가는 권력적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작품에 접근해간다. 그러나 정서영 작가는 위에 서는 것이 아닌 계속 흘러가려는 그런 성향을 보인다. 그래서 정서영 작품들 처음 보았을 때는 울음이 터지기 보다는 숨이 막혔다. 굳이 말하면 안규철의 작업은 이제 물성에서 벗어나서 좀 더 관객적인, 시적인 마음을 다루는 작업들인 반면 아직도 정서영 작가는 개념 조각의 본질인 '물성' 그 자체에 파고 들려고 한다. 그런 면에서는 정서영은 이우환과도 닮았다. 이우환은 재료가 가지는 특징적 물성과 그것이 어디에 놓이는지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그 관계성에 더 주목했다면, 정서영은 그 관계성을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지만 주를 거기에 두지 않는다.


 안규철 작품에서도 정서영 작품에서도 나는 일종의 언어들을, 불완전한 언어들을 느낀다. 불완전한 언어가 그려낼 수 있는 최대한의 완벽한 세계가 시라면 안규철은 작품 활동을 통해 그 '시'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 같다. 정서영 역시 언어에 주목하지만, 이 불완전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를 다른 방면으로 확장하고 채우려고 한다. 끊임없이 자라는 식물처럼. 무언가를 언어화 할 때의 슬픔과 그리고 그 기쁨. 설명하고 지시하는 언어가 아닌, 의미의 주변에서 자라는, 의미를 타고 오른 덩쿨 식물과 같은 언어들. 언어의 본질을 망각한 언어들. 정서영의 작업은 역시 언어 그 자체와 닮아있다. 언어가 언어라는 몸에 넣어버리기 위해 뭉뚱그려 버린 것들을 끄집어 올려내는 그런 말 이상의 말, "사물에서 조각이 발생될 때 마주하는 문제들을 해결/미해결이 아닌 다른 상태에 봉착하게끔 인도"3)하는 언어 이상의 말. 그렇기에 언어가 끊기는 지점 그러나 무언가가 분명히 차 있음을 알 수 있는 지점에 그의 작품이 위치한다.



<정서영전> 출품작들 중 하나



1) 국제갤러리 안규철 개인전 <당신만을 위한 말>(2017.2.21~2017.4.16)의 리플렛, 작품 설명

2) 안규철 작가 노트

3) 시청각 전시 <정서영전>(2016.9.6~2016.10.16)의 리플렛,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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