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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묭 Jun 28. 2018

“때때로 우연과 운명을 헷갈리기도 해”

윌리엄 트레버(정영목), 『루시 골트 이야기』, 한겨레출판, 2017

우연과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의지도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한 것처럼 느껴진다.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라는 뮤지컬을 좋아한다. 오랜 친구인 앨빈의 장례식에서 읽을 송덕문을 쓰기 위해 화자인 톰은 앨빈과 관련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놓는다. 그러곤 찾으려고 노력한다. 자신과 앨빈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걸 깨트린 그 작은 틈새”를. 작은 틈새 하나가 그 관계 전부를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톰은 믿는다. (그리고 나는 그런 톰의 욕망을 작가적 욕망인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윌리엄 트레버의 『루시 골트 이야기』 역시 그 순간,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작은 순간, 그 우연적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본 이야기의 배경은 1920년대 아일랜드인데, 영국이 신교로 국교를 바꾸자 본래 구교가 우세했던 아일랜드에서는 그 흐름에 따라 아일랜드 안 구교도 박해가 시작된다. 그 영향으로 구교 신자들은 신교도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르거나, 습격하는 식으로 보복을 하곤 했다. 루시 골트의 집안 역시 이 신교도 지주 집안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 루시 골트의 아버지, 에버라드 골트가 어떤 청년의 어깨에 총상을 입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실 이러한 배경들을 알지 못해도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골트 집안은 몇 대에 걸쳐 살아온 그 집을 떠나게 된다. 이건 어린 루시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루시는 그 지역을, 그 집을 너무도 사랑한다. 그렇기에 루시는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집을 뛰쳐나가는데 그 과정에 다리가 접질려 걸을 수 없게 된다. 부모는 루시를 찾아 헤맨다. 그들이 발견한 건 우연하게도, 그리고 불행하게도 루시가 부모 몰래 바다에서 멱을 감을 때 잃어버린 옷가지와 신발이다. 부모는 그것들로 인해 루시가 바다에서 멱을 감다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에버라드와, 루시의 어머니 헬로이즈는 괴로워한다. 왜 좀 더 천천히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던 걸까? 그 아이가 이렇게 뛰쳐나갈 수 있을 것을 왜 먼저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그들은 아이를 잃은 이곳에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그 자책에만 더 몰입하게 된다. 그래서 더 빠르게 그 집을 떠난다.

 

 그러나 그 시간에도 사실 아이는 살아있다. 루시는 나중에 발견되어 목숨을 부지하게 되고, 발을 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경솔한 행동, 실수로 부모의 인생이 틀어지게 되었음을 매번 자책하고 용서받기 위한 삶을 산다. 자신의 시간을 그 자리에 멈추어 놓는 것. 그게 루시가 택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 일이, 이 정도로 가혹한 대가를 치를 일인가에 대하여. 대부분의 경우였다면 루시의 잘못은 쉽게 용서받을 일이었기에. 이 사건은 루시와 에버라드, 헬로이즈의 인생뿐만 아니라 그때 총상을 입었던 청년, 호라한의 인생 역시 바꾸어놓는다. 그는 자신의 어릴 적 잘못, 골트 가에 불을 지르려고 했던 일을 떠올리며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한 어린 아이와 그 부모를 떼어놓고 한 아이가 속죄의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내내 생각하고 그 무게가 자신이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다고 생각한다. 그는 점점 미쳐간다.


 읽으며 이언 매큐언 『속죄』가 떠올랐다. 사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유의 이야기다. 운명과 우연이 사람의 생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는지에 대하여. 『속죄』에서는, 어린 나이에 했던 단 한 번의 잘못이 한 연인의 인생, 그러니까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게 된다. 주인공, 브리오니는 그 죄가 영원히 속죄될 수 없음을 안다. 당연하다. 그건 두 사람의 인생의 무게니까. 그럼에도 브리오니는 속죄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쓴다. 속죄될 수 없는 죄라고 해도 속죄를 위해 한 노력을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걸 부질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언 매큐언은 이런 식으로 삶의 태도에 대해 좀 더 묻는다면, 윌리엄 트레버는 그보다는 그저 담담히 루시의 인생에 조금 더 주목하는 편을 택한다.


 루시가 레이프를 사랑하면서도 그에게 “너는 내 인생에서 손님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건, 자신이 이미 누군가의 인생을 망쳐버린 적이 있기에 그리고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기에, 그렇기에 사랑하는 그를 자신의 저주스러운 운명에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레이프의 인생은 이미 잘못되어 있지 않은가. 레이프는 결국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하고 아이도 하나 얻지만 그 이후에도 루시가 종종 레이프를 떠올리며 살아가듯, 그도 역시 루시를 종종, 영영 떠올린다. 돌아가지는 않는다고 해도.) 아버지가 뒤늦게 돌아와 그녀를 용서했을 때에도 루시는 그럼에도 어딘가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어쩌면 루시는 오래전부터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던 부모는 자신을 용서할 것임을. 어머니가 평생 괴로워하다가 돌아가셨음에도, 아버지는 루시를 용서한 것처럼. 그럼에도 죄가 끝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건 루시 자신이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루시의 인생 전체는 ‘속죄’였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도 거절했고, 모든 행복도 거절했다. 그게 한 순간에 용서되어 사라져버린다면 그녀의 인생은 무엇이 되는가? 루시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호라한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집을 찾아왔을 때 그가 떠나고 나서야 처음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그건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격렬한 분노의 표현이다. 그때 아버지는 말한다. “그만 됐어. 그만 됐어.” 그 예절과 예의가 인생을 대하는 에버라드의 자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루시는 17년을 호라한이 있는 정신병원을 방문한다. 그는 루시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루시는 그렇게 꾸준히 그에게 인생을 쏟는다. 이걸 작가는 “구원을 가져오기 위한 나들이”라고 쓴다.


 이게 읽으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전개였다.. 레이프를 거절한 루시가 호라한에게 자신의 인생을 쓰면 어떡하지? 약간 전지적 로맨스 소설 읽는 관점에서 그랬다. 이런 식으로 루시가 성녀가 될 것을 택한다면 나는 그런 루시의 삶의 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물론 사람들이 그런 루시의 태도를 고귀하게 보고 성녀라고 보더라도, 루시 자신이 본인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다면 루시는 성녀는 아닐 것이다. 그건 작가가 서술대로, “시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반추”되어 “신화가 되기 전”까지는 적어도. 루시가 호라한에게 쏟는 이 “자비”가 사랑의 일부일까? 그녀에게 그게 자비라는 생각이 있을까? 사람들이 보았을 때 그건 자비이지만, 루시 본인에게는 어쩌면. 조금 더 젊은 시절의 루시는 호라한의 사죄에, “매일 저는 촛불을 켭니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뒤늦게 분노를 표현한다. 이 분노는 어떻게 어떤 식으로 사라질 수 있던 걸까. 시간이 이런 것을 놀랍도록 흩어버린다는 것을 안다. 어찌되었든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런 건 아니다.


 다시 우연과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운명에 대해 생각할  아직도 오이디푸스의 선을 벗어나기 어렵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본인이 인식하기도 전에 움직이는 것이기에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말고도 사실 없다. 그가 그걸 눈치 챘을  일은 이미  벌어졌다. 그가 해야  일은 그저  불행한 운명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운명에 대해  좋은 텍스트들을  이후에도 많이 접했다. 썸머 작가의 웹툰 <소라의 >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에게 어떤 운명이 있다면 그걸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도 결국  운명 안에 들어가는 걸까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런  운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외에도 좋은 부분이 많은데 “모두가 바라는 대로만  수는 없어. 정말로 간절히 바라는  있다면 그걸 위해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 . 그렇지 못하다면,  거기까지인 마음이란 거겠지.”“모두가 바라는 대로   없는데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에게 있는 걸까요?”  부분은 인상 깊다. 사실 <소라의 >에서 소라는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고 그것을 거부한다. 바라는 대로 살고 싶기에.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새어들 때가 있지. “어찌되었든 나의 운명이다. 이제는 받아들이자하는. 이건 포기가 아니다.) 아마 삶은 우연이라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악보 같은 것이겠지.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이지만 그걸 어떻게 연주할지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겠지. 사실 사람들의 인생이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는 한편 그 사람 하나하나가 결국 모두 다른 존재라는 것은 어쨌든 악보라는 형식을 빌려왔기 때문이겠지.


 웃는다는 건 입술을 휘어지게 만든다는 것/ 운다는 건 귀를 거칠게 만든다는 것// (…) 규칙을 깨닫는다면/ 모든 것을 다른 것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믿음// (…) '꿈속에서 만난다는 건 현실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것'// 때때로 우연과 운명을 헷갈리기도 해 미안 정신 사납지? 너는 내게서 멀어지는 척력일까? 사실 이 말을 하려 했어// (…) 윤, 너와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이 동시에 문을 닫고, 우리는 소수 그 자체가 되면서, 알지 못하던 모든 규칙을 깨달은 듯이/ 너는 숫자를, 나는 언어를 어느 도형 위에 남기더라도 (양안다, 「양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문학동네』 2017년 여름 호 수록)


 2018/4/29, 스터디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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