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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코리 Mar 20. 2022

동시대 미술, 어쩌란 말이냐

동시대 젊은 작가를 다루는 기획전시


한남동에 위치한 삼성 미술관 리움. 국내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술관이다. 전시마다 보여주는 완성도에 늘 감탄하고, 작가를 선정하는 안목 또한 뛰어나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결국 미술관의 핵심이라고 생각할 때, 리움은 그 역할을 거의 항상 너무도 성공적으로 해내왔다. 리움 전시는 거의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리움은 2006년부터 ‘젊은 한국 미술가들’을 선정하여 전시를 열어왔다. 미술관의 역할은 거창하게 말해 인류가 간직해야 할 문화 유산을 수집 및 관리하고, 이를 대중과 공유하며, 앞으로도 예술이 잘 이어질 수도 있도록 지원(해야)한다. 이것이 미술관의 책무다. 아트 스펙트럼과 같은 전시는 그 기능에 있어 후자에 속한다. 전시를 통해 젊은 미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며 대중에게 이런 새싹들이 있다고 소개하는 것이다. 큐레이터에게 될성부른 싹을 알아 보아야 하는 예리한 눈이 어쩌면 가장 크게 요구되는 전시라 할 수 있다. 아트 스펙트럼이 리움이 잠시 문을 닫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열렸고, 이번 <아트스펙트럼2022>는 재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데도 8명을 선정하여 그들의 작품들로 기획전시실을 가득 채웠다.


티켓을 예매할 때부터 쉬운 전시는 아닐 것이라고, 마음에 남는 작품이 단 하나도 없을 수도 있다고 각오했지만... 하아… 난해하다. “어쩌란 말이냐.”

거대한 체력 단련장 같은 구조물에 붙은 비디오를 통해 작가가 거기 매달리며 운동 또는 곡예를 하는 영상을 보는 것. 싸구려 문을 열고 들어가 옛스러운 티비 병풍 등이 배치된 방에 멀뚱히 있는 것. 대기줄에 기다렸다가 지분 확보의 계약서를 쓰고 나오는 것 (개인 정보 남기기 너무 불편). 불편한 자세로 바닥에 놓인 영상을 보는 것. 천장까지 가로지르는 거대한 캔버스 벽면 앞에 서는 것.

미술관은 이런 일련의 작품을 통과하며 관람객이 무엇을 느끼기를 바랐던 걸까. "요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이런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주목하는 사람들이다?” 여기까지인가? 그 다음에는? 공감이 된다거나, 지적 통찰을 얻는다거나, 눈이 즐겁다거나... 관람객에게 그런 반응을 얻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여. 재밌지?" 이것이 진정 끝이란 말인가.



너무도 어려운 동시대 미술

아트스펙트럼 뿐만 아니라, 전시를 보고 나서 미궁에 빠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어렵기 때문이다. 대중 강연을 할 때마다, 그리고 글을 쓸 때마다, “미술, 어렵지 않아요~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이것 봐요~”라고 말하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동시대 미술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미술은 어려워.” 그리고 미술 앞에서 무안해 한다. 과한 겸손을 보이며 “내가 잘 몰라서…”라고 말한다.  아니다. 틀렸다. 동시대 미술이 어려운 것은 관람객이 몰라서가 아니다. 위로가 될 지 모르겠지만, 미술사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내게도 동시대 미술은 너무도 어렵다. (연구의 깊이는 뒤로 하더라도) 지구에서 ‘미술사’로 받을 수 있는 최종학위까지는 받았음에도 설명문 없이는 작품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설명문을 읽어도 별 도움이 안 될 때가 많다. 나 뿐만이 아니다. 미술계 내부에서도 이런 회의와 반성의 목소리는 (일부로라도) 존재한다.



도대체 동시대 미술은 왜 이렇게도 어려울까?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지만, 원래 그렇다는 말을 해야할 것 같다. ‘동시대’라는 것이 원래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그렇다. 미안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시간적으로 거리가 조금 있어야 우리는 그 시대를 파악할 수 있다. 한국 전쟁이 터졌을 때, 그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이 전쟁이 왜 발생했는지, 어떻게 되는 건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파편화된 정보가 산발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다. 동시대 미술도 마찬가지다. 학자들이 부지런을 떤 덕분에 몇 십년 전의 미술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정리를 했다. 그래서 중요 미술가나 작품들, 그 의의도 나름의 합의를 이루어 놨다. 그런 작품들은 교육 과정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공부를 해보기도 했고, 관심만 있다면 아주 손쉽게 요점정리 식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대 미술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저 그 안에 던져져 있을 뿐이다. 아직 그 누구도 ‘정리’를 하지 못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관람자들은 전시의 어느 부분에서라도 ‘아는’ 구석을 마주쳐야 안심을 하는데, 동시대 미술 전시에서는 그런 요소를 만나기 쉽지 않다. 미술가 이름도, 형식도, 내용도 낯설다. 그렇게 생각하면, 동시대 미술관에서 우리가 혼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게다가 아트스펙트럼처럼, 젊은 작가들의 경우는 더 감을 잡기 어렵다. 작가 자신도 한창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중이기 때문에 그 내러티브가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전시 자체가 어떤 주제에 따라 엮였다기 보다는 다양한 젊은 작가를 보여주자는 것이 목적 자체이기 때문에 전시에 일관된 '맥'을 찾기가 어렵다.

또 하나. 내가 진단하기에는 동시대 미술은 자꾸만 자기들이 ‘시각 예술임을 간과한다. 많은 작품의 목표가 ‘눈의 만족 있지 않다. (적어도 가장 우위에는 두지 않는다.) 1950년대를 휩쓸었던 미국의 형식주의 모더니즘(가장 대중적인 예시로 마크 로스코) 이후, 미술은 글자, 진짜 사물,   희안한 재료를 사용해서 연극과 같은 행위를 하거나(어려운 말로 퍼포먼스), 사진을 찍어서 벽에  붙이고 밑에 의자 따위의 물건을 놓거나(어려운 말로 개념미술), 때론 유튜브 보다 허접해보이는 영상을 보여주는(어려운 말로 비디오 아트) 행태를 보인다. 이런 경우, 여전히 미술에서 시각적 만족을 바라는  같은 관람객의 기대는 대개 충족되지 못한다.

시각적 만족이라는 것이 매우 주관적이라면, ‘눈으로  봤을 때의 완성도라는 말로 바꿔도 좋겠다. 이것이  아름다운 색채 조합이나 그럴싸한 기술 같은 ‘고전적 요소로만 얻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쉬빙이나 서도호의 작품처럼 극도의 디테일에서 나올 수도, 구원다와 같이 엄청난 스케일에서 얻어질 수도, 제프 쿤스처럼 쨍쨍함에서  수도 있다. 조야한 재료를 사용해도 상관 없다. 최정화의 경우를 보라. 싸구려 재료를 얼마나 세련되게 사용하는지 말이다. 다만, 어설퍼야 한다면,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비디오 작업에서 전선이 보이려면 그것조차 작품이 되어야 한다. 전선이 보여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원래   같은 느낌의 작품이라거나, 지저분한 것이 내용인 작품이라거나..  이런 것들 말이다.  앞에 놓이는 관람 공간-소파나 의자나 바닥이나-까지도 작품의 일부여야만 한다. 합당한 이유가 있는 전선 노출,  맞아 떨어지는 의자가 아니라면, 후진 비디오 작품이자 전시다.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움 천대 받는 데는 미술사적 배경이 있다. 1950년대에 클레멘트 그린버그라는 평론가는 미술에 있어 ‘순수 회화 최고로 두며, 그것을 감상하는 데는 ‘ 핵심이라 강조했다. 여기 반발한 미술인들은 1950년대 말부터 ‘ ‘머리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래서 ‘ 사용하는 퍼포먼스가 등장하고 ‘머리 쓰는 개념미술이 나온 거다. 그리고 미술은  방향 그대로 진행되어 왔다. ‘눈만 중요하지 않다 주장은 맞다. 미술에는 머리도 중요하고 몸도 필요할  있다. 그러나  말이 ‘눈은 중요하지 않다 되어서는 안된다.  무렵, 그러니까 미술이 회화의 절대적 위치를 흔들면서  재료를 확장하던 1960년대에는 미술가들이 ‘시각적 만족까지 고려할 여유도, 필요도 없었을 거다.  도전 자체로도 너무 의미 있었고 흥미로웠으니까. 그리고 ‘ 극단적으로 배척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명료히 했어야 하니까.

만일 동시대 미술 전시에서 당신의 눈보다 머리를 쓰기 원한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아주 정확하게 핵심을 뚫은 거다. 그런 시대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꼭 이렇게까지 어려워야만 할까?

아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어렵지 않게, 아니, 덜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자. 먼저 미술가님들. 지금은 2020년대다. ‘눈’을 멸시해도 충분히 멋지던 때로부터 반세기도  . 요즘은 비디오도 퍼포먼스도 설치도 식상하다. 게다가 모든 작품은 개념미술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난해하다.) 이런 시대에 미술은 다시 ‘ 붙잡아야 한다. 이제는 그럴 때다. 특히 다루는 내용 자체가 어려운 경우는 더욱  ‘눈의 끌림 신경 써야 한다. 후기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인공지능이 만드는 미래, 가상화폐 등등다큐멘터리로 봐도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인데, 미술로 보려니 그야말로 넘사벽이지 않겠는가. 물론, 작품의 이해를 돕는 오디오 가이드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해설이라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눈으로 보고 마음이 동할  켜는 거다. 상대를 만나고 호감이 생겨야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볼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닥치고 ‘들어 하는 것이 무슨 미술인가. 관람객은 강의를 들으러 미술관에 가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보러간다. 아무리 ‘경험이니 ‘체험이니 하는 것이 중요하더라도, 미술관의 핵심 고객에게는 ‘보는  먼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 먼저인 사람은 놀이동산에 가지 귀한 시간과  들여 미술관에는  온다.

눈에 와닿는 작품. 그래서  알고보니 아니 이런 뜻이!? 라며 즐거운 발견을   있는 작품. 그리고 거기에 대해  또한 이러쿵 저러쿵 의견을 제시할  있는 작품. 이것이 좋은 작품이고, 그것들을 선별하여 보여주는 전시가 좋은 전시다. 확신하건대 그런 작품들을 만날  관람객은 전시가 ‘어렵다 느낌을  받을 거다. 설령 동시대 미술이라  지라도.

아무리 천지가 개벽해도, 미술은 시각 예술이어야 한다. 미술에서 시각적인 만족을 버릴 때, 미술은 관람객뿐만 아니라 그 존재의 이유도 잃는다.

그러니 동시대 미술계여. 제발 시각적 만족이라는 미술의 존재 이유를 포기하지 말아 주시라. 동시대 미술이라는 카오스에서도 눈에 반짝이는 어떤 것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먼 걸음을 마다하지 않은 (심지어 돈까지 낸) 관람객을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미술관 관계자님들. 제발  쉽게 씁시다. 점차 나아지는 추세라고 믿고 싶지만, 여전히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전시 설명과 작품 설명이 비일비재하다. 미술관은 학술 대회가 아니다. 미술관은 미술이라는 시각 언어를 한국어나 영어 따위의 문자 언어를 사용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통역’해서 보여줘야 하는 곳이다. ‘관람객 교육’이라는 것이 거창한 게 아니다. 알아듣기 쉽게만 써도 그 ‘교육’의 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관람객이여. 우리 제발 미술 앞에서 ‘내 탓이오’는 그만하자. 미술관에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미술에 대해 충분한 열린 마음과 다정한 태도를 갖고 있다. 무턱대고 미술을 비난하는 부류가 절대로 아니다. 이해하고자, 좋아하고자, 친하게지내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당신이 모르겠다고 한 들 그 누가 당신을 탓할 수 있겠는가. 친해지고 싶어서 돈과 시간을 쓰며 노력을 기울이는데도 별 성과가 없다면, 한 번쯤은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해도 좋지 않은가. 그러니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말하자. ‘제가 잘 몰라서’라는 쓸 데 없는 겸손이나(아니 왜 미술을 ‘알아야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좋았다/재미있었다’라는 감상을 남기거나(관계자가 검색해서 보면 만족해서 또 그런 전시를 만들 텐데 괜찮은가?), 인스타에 올릴 사진 건졌으니 됐다고 자위하거나(전시는 더 풍부하고 깊은 리액션을 이끌어내야 마땅하다), ‘미술은 원래 어려워’라고 체념하지 말자(역사는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중이니까). 미술관에 걸음하는 당신의 진솔한 반응이 동시대 미술계를 움직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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