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영
오늘은 옆에 있는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소녀>라는 작품입니다. 앳된 얼굴의 소녀가 쪼그리고 앉아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네요. 긴 팔 소매에 양 손을 넣은 것을 보니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나 봅니다. 소녀의 앞뒤에 피어 있는 할미꽃이 이른 봄임을 알려주고 있군요. 뒤쪽에는 바구니가 자리하고 있네요. 여러 정황을 보니 아마 이 소녀는 봄나물을 캐러 나왔다 잠시 앉은 모양입니다. 머리가 흐트러질 만큼 열심히 돌아다녔나 봐요.
이 귀여운 소녀를 그린 작품은 1935년에 완성된 그림입니다. (현재 원본은 사라지고, 원색도판과 초본만 남아 있습니다.) 당시에 엄청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지요. 이 그림이 그려졌던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였습니다. 그 때 미술계에서 인정하는 '성공'은 <조선미술전람회>라는 일본 주최의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것이었어요. 조선 사람이 화가로 등단할 수 있는 공식적인 등용문 역할을 했던 제도이자 화가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관전이었습니다. 박수근이나 나혜석과 같이 여러분이 이름을 알고 있는 많은 화가들이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요. <소녀>는 그 공신력 있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과 더불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는 영예를 끌어 안았던 작품입니다.
작품을 그린 사람도 화제였는데요, 그것은 이 작가가 '정찬영'이라는 여성 화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여성 화가라는 존재 자체가 드물었거든요. 그런데 그 희귀한 여성 화가 중 한 명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탔다는 것은 정말 놀랄 만한 일이었겠지요. 게다가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강했던 한국화 부분에 출품한 작품이었습니다. (참고: 서양화와 한국화(동양화라고도 부릅니다)를 구분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재료에 따릅니다. 쉽게 말해 캔버스에 유화를 올린 것은 서양화, 종이에 먹을 사용하거나 분채 가루를 물에 개어 색을 입힌 작품은 한국화라고 분류하는 것이지요. <소녀>는 후자에 속합니다.) "최고상을 받은 화가가 여자라고?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렸길래? 어떤 사람인데?" 이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키에 충분했던 것이지요.
정찬영이라는 화가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상을 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6년 전이었던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못가>로 공모해서 입선을 하면서 화가로 데뷔했고, 1931년에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광>으로 특선을 차지했습니다. 화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쌓아 올리고 있었던 중에 드디어 창덕궁상까지 거머쥐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창덕궁상을 받은 지 2년 뒤인 1937년, <공작> 이라는 작품 출품을 끝으로 더 이상 공식적인 화가로서의 행보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승승장구하던 정찬영이 돌연 절필을 선언한 것이지요. 아니, 한창 잘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왜요?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 글은 '여성으로서의 삶'이라는 데 포커스를 맞추어 정찬영이 절필했던 이유를 찾아가려 합니다. 그녀의 생애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가정을 이루더라도 작품활동은 계속한다"
정찬영은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1906년, 평양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나 서문여고를 졸업하고, 사립 숭현여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어요. 그 당시 여자로서 교육을 계속 받고, 또 선생님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집에서 그만큼 교육을 뒷바라지 해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안정적인 생활이었지만, 정찬영은 그림이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상경하여 경성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지요. 그렇지만, 학교가 폐쇄되면서 1926년경부터 개인교습을 시작합니다. 채색한국화로 명성이 자자했던 이영일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요. 이영일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던 일본화가 이케가미 슈우호의 문하생이었습니다. 스승의 계보를 따져보면, 정찬영은 일본 채색화를 간접적으로 배운 셈이지요.
이영일의 문하생으로서 채색 한국화를 배우며 정찬영은 화가로서 빠르게 성장합니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지 3년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등단했어요. 정찬영의 나이 23세 때였습니다. 데뷔작인 <연못가>는 총133점 출품작 중 31점의 입선작으로 뽑혔던, 그러니까 4:1 정도의 경쟁률을 뚫었던 작품입니다.
화가로 등단한지 1년 뒤인 1930년에는 결혼을 했는데요, '가정을 이루더라도 작품활동은 계속한다'는 조건 아래였습니다. 정찬영의 그림을 향한 열정을 볼 수 있는 동시에 그 당시 여성으로서 결혼과 일을 병행하기가 녹록치 않았음도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정찬영은 결심한대로 결혼 후에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열심을 냈다고 표현하는 편이 보다 적절할 겁니다.
결혼식을 올렸던 1930년의 <조선미술전람회> 9회전을 포함하여 10회, 12회, 14회, 15회, 16회에 꾸준히 출품했습니다. 민간전시회였던 <서화협전>에도 세 차례 참여했습니다. 참여만 한 것이 아니었지요. 출품하는 족족 상을 탔습니다.
사실 그림을 그려서 전시에 출품하는 것은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자발적이고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는 것은 정찬영에게 그림이 많은 의미를 갖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림을 향한 본인의 열정과 의지가 상당히 강했음도 시사하고요.
열심히 하는 만큼 점차 명성도 얻었습니다. 세간의 주목도 심심치 않게 받았지요.
당시 신문과 잡지에는 정찬영에 대한 기사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요, 그 중 <조선미술전람회> 10회전을 앞두고 했던 인터뷰가 눈에 띕니다. 출품을 앞두고 정찬영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금년에는 두 점을 내려고 합니다. 한 점은 <모란>인데 그것은 다 그렸고, 지금 그리는 이것은 보시는 바와 같이 나무에 앉은 공작인데 아직 완성할 날이 멀었습니다. 금년에는 꽤 촉박하게 되었습니다. 화제는 여광이라고 부치려고 합니다."
결혼이라는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림을 그릴 시간이 많지 않았던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출품날짜를 맞추기에 꽤 촉박하다는 정찬영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지요.
정찬영은 이어서 "남들은 여자는 남자보다 결혼 후 더 자기의 취미를 곱게 살리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전의 몇 곱절 그림에 정열을 기울여 보려 할 뿐입니다. 물론 그분 (씨의 부군)도 대찬성한답니다"라고 말합니다. (윤범모 "여류 채새화의 선구! 정찬영" p.9 재인용) 결혼 후에도 직업 여성으로서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이 다시 한 번 보이는 대목입니다. 남편 역시 적극적으로 아내를 지지한다는 것도 볼 수 있고요.
정찬영이 말을 마치자마자 옆에 있던 스승 이영일 화백이 덧붙입니다. "찬영 씨는 한평생 그림에 몸 바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열심인지 그렇게 하고서야 성공이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제자의 열심을 칭찬하며 화가로 계속 남기를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기자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괴로움이 많은 우리 화단에서 더욱 이중 삼중으로 괴로움이 많은 여자의 몸으로 오로지 그 길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씨의 예술은 반드시 우리의 기대를 헛되이 하지 않으리라 보고 씨의 전도를 축복한다."('선전을 앞두고-화실을 찾아서', "매일신보" 1931.5.10~17)
화가로서의 길을 꾸준히 가는 것이 비록 녹록치 않은 상황이지만, 화가 자신이나 남편, 스승, 또 제3자 모두 정찬영이 꾸준히 그림을 그릴 것을 기대하고 응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작 시간이 부족했다고 말했지만, 그 해 정찬영은 <여광>으로 특선을 받습니다. 6.25 때 망실되어 지금은 초본과 도판으로밖에 확인할 길이 없지만, 같은 소재를 그린 <공작>이나 <공작도 병풍>으로 보아 힘차고도 섬세한 작품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동아일보는 "정찬영 여사 동양화에 여자론 처음 특선"이라는 제목 아래 이를 크게 보도했는데요, "<여광>은 신혼기념 제작품이며 '조선여자로서 동양화에 처음 특선의 영예를 차지한 작품'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여성 화가가 드물던 그 시절, 정찬영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호기심은 그녀의 열정과 열심과 합쳐져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습니다.
'삭갈리는' 마음
그런데 정찬영의 그간 내면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특선을 탄지 3년만의 고백입니다.
"결혼 전에는 그야말로 그림에 전심전력이었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살림이 복잡해지고 애기까지 있고 보니 그림 그리는 마음이 삭갈려서 도무지 열중되지 않습니다. 열이 적어지고 마음이 해이해져요. 창경원에 가서 새를 그리다가도 아주 열중해서 스케치는, 눈 위로 시계바늘만 뵈면 벌써 그림 생각은 십리 만리 달아나고 애기 생각 살림 생각이 뛰어오는군요." ('서화협회, 조선미전에 출품하는 여류화가들', "신가정" 1933.5.)
마음이 삭갈린다, 열이 적어진다, 마음이 헤이해진다, 애기 생각 살림 생각이 뛰어 온다... 아무리 자신의 일에 열정이 있다 하더라도, 출산 뒤 마음이 나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시와 때를 가리지 않는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모로서 핏덩이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까요. 예전에는 중요한 것이 '그림' 하나뿐이었다면,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가 하나 더 생긴 것이지요. 나의 전력이 100이라면 이제는 그것을 배분해야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즘의 엄마들도 똑같거든요.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일에 하루 종일 몰입할 수 있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집중할 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과 육아가 양자선택의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회구조적으로 많은 부분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문화적으로 성숙해야 하지요.
그렇게1 고군분투하던 정찬영은 1939년 큰 일을 겪습니다. 둘째 아들이 사망한 것입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안간힘 쓰던 정찬영이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결정적 사건이었지요. 이 일에 대해 정찬영이 남긴 말이나 일기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엄마로서 그녀가 느꼈을 슬픔, 자괴감, 그리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새끼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가!"하는 회의감,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떨쳐지지 않는 죄책감을요.
또 다른 길
그 뒤로 화가로서의 정찬영의 활동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지도, 화가로서 인터뷰에 응하지도 않았거든요. 정찬영은 "현모양처"로 살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반가운 것은 그녀가 완전히 그림에서 손을 놓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정찬영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한편, 식물 세밀화를 그렸습니다. 남편의 식물 연구를 돕기 위함이었지요. 앞서 말한, '결혼을 해도 작품 활동은 계속한다'라는 조건 아래 정찬영을 신부로 맞았던 남자가 동경제대 약학부 출신의 식물학자 도봉섭이었거든요. 부부는 회기동에서 신혼집을 얻어 살았는데요, 무려 5백 여 평의 대지였습니다. 거기에 양옥을 손수 짓고, 남편이 여기 저기서 구해온 갖가지 식물을 심어 다양한 꽃과 나무의 정원을 이루었습니다. 정찬영은 이 정원에서 식물을 돌보며 그림을 그렸던 것이지요. 4남매를 키우면서요.
정찬영의 세밀화는 그녀의 놀라운 관찰력과 묘사력을 보여줍니다. 표본의 기능을 해야 하기 때문에, 화려한 구도 감각이나 명암 능력은 볼 수 없지만, 애정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고 특징을 파악하여 그리는 화가로서의 뛰어난 역량이 유감 없이 발휘되었습니다. 현대판 일러스트라고 해도 믿을만큼 세련된 색채도 눈에 띕니다. 크기도 굉장히 큽니다.
정찬영의 식물 세밀화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한국화를 연구하는 미술사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식물을 연구하는 식물학자들도 같이 공부하면 좋겠어요. 여성 미술가의 종적을 연구한다는 의미도 물론 있지만, 20세기 초 우리 나라 식물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하거든요.
나름의 방법으로 그림 활동을 지속하던 정찬영이 완전히 붓을 놓은 것은 1950년 이후입니다. 한국전쟁 때 서울대 약대 학장을 지내던 남편 도봉섭이 납북되면서 생계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정찬영은 미술교사로 취직하여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바깥일, 가사와 육아 모두를 한 몸으로 감내해야 했지요. 자아실현을 위한 그림 그리기에 할애할 시간도, 에너지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을 겁니다. 식물학자인 남편이 곁에 없기에 더 이상 식물을 그릴 이유도 환경도 사라졌을 테고요.
예전의 저라면 정찬영의 의지를 나무랐을 겁니다. 더 열심히 '노오력'을 했어야지 했을 거에요. 커리어를 접었으니 실패한 인생이라 평가했을 테고요.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삶의 어떤 순간에는 '노오력'을 할 수 없는 때가 있기도 하다는 것, 또 혼자서는 뚫지 못하는 일도 있음을 알게 되었거든요. 삶의 구비구비마다 '나의 꿈'도 달라질 수 있음도요...
지금의 저는 오히려 더 소중한 것을 지키려 젊은 시절의 꿈을 놓은 정찬영의 용기와 결단력이 존경스럽습니다. 신세한탄으로 세월을 낭비하지 않은 긍정적 성품과 지혜도 본받고 싶고요.
꼭 처음 가졌던 꿈을 이루는 것만이 '성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이 정해준 기준이 '성공'의 잣대도 아니고요. 긴 삶을 살아내면서 중요한 순간마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선택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진짜 성공한 삶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감히 말하자면, 정찬영의 삶은 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 본글은 지학사 고교독서평설 2020년 3월호에 게재한 내용을 다소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