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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코리 Feb 04. 2020

소망하기를 멈추지 말라

오노 요코

“결혼 해. 좋은 일이 더 많아. 그런데 결혼해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말고 너로 살아.”

 조남주 작가의 소설 『이혼 일기』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이혼 절차를 밟는 중인 언니가 결혼 준비를 시작한 여동생에게 건네는 조언입니다. 그러나 이미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로 살고 있는 이들은 알고 있어요. 나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이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노 요코입니다. 대중들에게는 락의 전설 존 레논의 두 번째 부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미술과 음악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펼친 일본계 전위 예술가이지요.

세상은 한 때 오노 요코를 마녀라 불렀습니다. 비틀즈를 해체시킨 주범으로 지목당하고, 존 레논을 이상한 전위 예술의 길로 이끌었다 평가 받고, 그의 돈을 노렸다고 의심 받았기 때문이었죠. 검증되지 않은 유언비어나 악의에 찬 헛소문에 따른 타이틀이었지만, 한 번 박힌 부정적인 이미지는 끈질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노 요코에 대한 이미지를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싶습니다. 세상이 정한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았던, 동시에 미술과 음악의 두 영역에서 전례 없는 작품 세계를 구축했던 멋진 예술가로 말이지요.


“동등한 시간, 동등한 공간, 동등한 권리”

 오노 요코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데에 있어 존 레논과의 결혼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결혼 당시 오노 요코는 전위 예술 그룹 안에서만 인지도를 갖고 있던 예술가였고, 존 레논은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던 락 스타였거든요. 경제적인 역량에서도 단연 레논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고요. 이런 경우, 오노 요코 쪽이 존 레논의 사랑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안달복달 했으리라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둘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쥔 것은 언제나 오노 요코였다고 해요. 단적인 예가 존 레논이 “잃어버린 주말”이라 불리던 시기입니다. 1973년 10월부터 1975년 1월까지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은 잠시 별거했어요. 요코는 부부의 개인 비서였던 메이 팡에게 미국 이민국과의 분쟁, FBI의 감시, 예술에 대한 압박 등으로 심신이 취약해진 레논을 데리고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향할 것을 지시했지요. 메이 팡은 정기적으로 광란의 파티와 술과 마약으로 점철된 존의 동태를 요코에게 보고했고, 오노 요코는 남편이 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여러 조취를 미리 취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논은 오노 요코에게 전화를 걸어 뉴욕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오노 요코는 그다지 내켜 하지 않았지만, 레논은 그들의 보금자리였던 다코타 빌딩의 맞은 편 호텔에 투숙하기 시작했어요. 레논의 콘서트를 계기로 남편을 마주한 오노 요코는 레논이 술과 마약을 끊고 방탕한 생활방식을 바꾼다는 조건 아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요코와 레논은 합동 작품을 많이 발표했는데,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리더의 역할을 한 것은 오노 요코였습니다. 그들의 획기적인 작품 <평화를 위한 침대 시위>(Bed-Ins for Peace)를 예로 들어 볼게요. 1969년, 요코와 레논은 신혼여행을 암스테르담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기자들을 자신들이 묵고 있는 힐튼 호텔 스위트룸으로 불렀지요. 특종감을 노린 기자들이 호텔 방에 도착해서 본 것은 하얀 침대에 잠옷을 입고 평화롭게 앉아 있는 부부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진: Bed-Ins for Peace] 일종의 퍼포먼스였죠. 당시 한창이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비폭력적 시위였습니다. 레논과 요코는 '배기즘'(Bagism) 운동도 함께 펼쳤습니다. 자루 속에 들어가는 것을 통해 성별, 나이, 외모를 가린 채 편견 없이 대화를 나누자는 컨셉이었지요. [사진: Bagism] 전세계 리더들에게 도토리를 보내면서 평화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심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본인들이 직접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영국의 코번트리 대성당(Coventry Cathedral)에 도토리를 심기도 했고요.

Bed-Ins for Peace, 1969



acorns for peace, 1969


이러한 작품의 형식이 오노 요코로부터 시작되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간 지속적으로 무언의 퍼포먼스를 해왔던 것은 오노 요코였으니까요. '평화'라는 주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년 시절 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겪었던 오노 요코에게 '평화'는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였거든요. 요코를 만난 후 '평화'는 레논에게 큰 주제가 되었다는 것은 이런 공동 작품 뿐만 아니라 그의 솔로곡 <Imagine>에도 나타납니다.

 존 레논의 감시자이자 때때로 연인 역할까지 담당했던 메이 팡은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노 요코가 주도권을 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존은 요코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말이다.”

 명성이나 재산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앞서 있던 사람 앞에서 주눅 들기가 얼마나 쉬운지, 특히 그런 사람이 연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 맞추느라 자신을 잃기가 얼마나 쉬운가를 생각하면, 오노 요코가 언제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는 것은 놀랍고요. 오노 요코의 자신감과 당당함은 가히 존경스럽습니다.           



“내 공간도 갖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공간을 만들 수 있겠는가?”

 오노 요코는 레논과 결혼하기 전, 그녀의 두 번째 남편과 첫 아이 쿄코를 낳았습니다. 일본에서 한창 전위 예술가로 작품을 발표하고 인지도를 쌓아가던 무렵이었지요. 당시 오노 요코는 육아에 힘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직 작품에 몰두하여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하고 싶었거든요. 아이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스스로 아이를 맡기도 거부했고, 아이 돌보미를 쓰는 것도 못마땅해 했다고 해요. 오노 요코가 원한 유일한 해결책은 남편이 아이를 전담해서 양육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이라 여겨지던 생활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부부의 불화는 계속되었고, 관계는 결국 파경을 맞았습니다. 양육권은 아이 아버지에게 주어졌고, 오노 요코는 방문권을 가까스로 따냈을 뿐이었어요. 그러나 오노 요코에게 화가 많이 났던 아이의 아버지는 자주 이사를 하거나 아이의 이름 대신 9개의 가명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오노 요코를 딸로부터 떼어 놓고자 했습니다.

 언제나 강인해 보이던 오노 요코였지만, 딸 쿄코에 대해서만큼은 그리움과 미안함을 항상 안고 있었습니다. 당시 요코가 느끼던 죄책감은 비명과 울부짖음, 외침으로 가득한 ‘걱정 마 쿄코, 엄마는 눈 속에서 그녀의 손을 찾아 헤맬 뿐’이란 곡에 날 것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때때로 딸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시기에 오노 요코는 사설탐정을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딸에 대한 법적 방문권을 거부하는 아이의 아버지를 차마 고소하지는 못했어요. 아이 앞에서 아버지가 연행되는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시간이 오래 지나 1986년, 오노 요코는 잡지 『사람들(People)』에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게재했습니다.       

“사랑하는 쿄코에게. 지난 모든 시간 동안 내가 너를 그리워하지 않았던 날은 하루도 없었단다. 너는 내 마음 속에 언제나 있었어. 그렇지만, 나는 너를 찾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으려 한다. 너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싶어서야. 이 세상의 모든 행운을 너에게 보낸다. 혹시라도 네가 내게 연락하고 싶다면, 내가 너를 깊이 사랑하고 있고 네게 소식을 듣는다면 무척 기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렴. 그러나 내게 연락하지 않더라도 미안해하지는 말거라. 나는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하고 지지할 거야. 사랑을 담아, 엄마.”     

 편지를 본 지 8년 뒤인 1994년, 결혼을 앞둔 쿄코는 엄마를 찾았습니다. 오노 요코가 마지막으로 딸을 만난 지 23년 만이었어요.

 만약 그간 요코가 첫 번째 딸 쿄코에게 ‘좋은 엄마’로서 존재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그녀 혼자만의 탓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책임은 부모 역할에 있어 파트너쉽을 발휘하지 못했던 부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으니까요.

 오노 요코가 바라던 어머니로서의 역할은 존 레논과 낳은 아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레논과 다시 합친 1975년, 마흔 두 번째 생일을 앞두고 오노요코는 임신을 했고, 출산은 위험하다는 진단과는 달리 건강한 남자 아이를 낳았습니다. 부부는 이 아이의 이름을 “션 타로 오노 레논”이라 지었습니다. 집에서 아기를 돌보는 것은 주로 아버지 존 레논이 맡았어요. 그는 당분간 일체의 음악 활동을 접고 주부 일에 매진했습니다. 유모차를 밀며 동네를 산책했고, 아이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는데, 이 시기 존 레논은 “이제야 비로소 진짜 삶”을 살고 있다고 행복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오노 요코는 바깥일을 맡았습니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저녁 때 집에 들어와 “잘 있었니?”라고 묻고 자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어요. 금융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돈에 대한 감각과 사업가 기질을 십분 발휘하며 비틀즈 관련 비즈니스를 능숙하게 처리했습니다. 이 무렵 이들 부부의 재산은 크게 늘어 버지니아, 버몬트, 뉴욕 주에 걸친 개츠킬 산의 농지, 한 마리당 추정 가격이 26만 5천 달러인 소250두, 롱 아일랜드 콜드 스프링 하버에 있는 주말 농장, 플로리다 웨스트 팜 비치에 있는 빌라, 원양 요트, 그 밖의 골동품과 미술품 등을 소유했습니다.  

 통상적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맞바꾼 부부는 언론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더 정확히는 오노 요코가 홀로 화살을 맞았죠. 유명한 음악가 남편에게 마법을 걸어 못난이로 만들어 버리고, 재산을 불리는 데 급급한 탐욕스러운 여자라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노 요코는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레논도 마찬가지였죠. 세간의 평가에 따라 요동하기에는 자신들의 삶이 너무나 충족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들의 행복은 “아름답다”는 가사가 계속 반복되는 존 레논의 유작 <더블 판타지(Double Fantasy)>(1980)에 잘 드러납니다.

 첫 번째 자녀였던 쿄코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자녀인 션에게도 오노 요코는 따뜻한 밥을 해주고 목욕을 시켜주는 엄마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아들을 부양했지요. 현재 음악가의 길을 걷고 있는 아들에게 오노 요코는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굳이 세상이 마련해준 방식을 따르지 않더라도 충분히 ‘좋은 엄마’일 수 있음을 오노 요코를 통해 봅니다.      



“예술은 진실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아내나 엄마라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틀을 깼던 삶과 똑같이 오노 요코는 예술에서도 혁신적인 면모를 선보였습니다.

 미술에 있어 오노 요코의 작업은 관람객 없이는 작품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관람객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돋보기를 들고 천장을 들여다보거나, 가위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가 미술가의 옷을 자르거나, 종이에 소원을 써서 나무에 매달아야 비로소 완성되지요. 완성된 작품을 제시하는 통상적인 미술가의 역할과 주어진 작품을 가만히 서서 감상해야 하는 관람객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뒤바꾼 방식입니다. 지금에야 관람자 참여작품이 많이 있지만, 오노 요코가 이런 작품을 처음 발표한 것이 1960년대였습니다. 그 당시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도 혁신적입니다. 파격에 가까울 만큼이요.

오노 요코, Cut Piece, 1964

오노 요코의 음악도 전혀 새로운 면모를 보입니다. 일례로 요코가 작곡한 <비밀 곡>은 딱히 악보랄 것이 없어요. 음을 하나 정하고 새벽 5시부터 오전 8시 사이에 숲 속에서 부르라는 지시문이 곡의 전부입니다. 때론 내내 소리를 지르는 곡을 만들기도 했어요.

이 모두 미술과 음악에서 관례에 맞추기 보다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용감하게 실천한 결과였습니다.

 동시에 오노 요코는 ‘미술가’나 ‘음악가’라는 개념에도 금을 냈습니다. 그녀는 미술가이자 음악가였고, 연주자이자 작곡가, 공연자이자 기획자이기도 했지요. 오노 요코의 경계 없는 활동 범주는 그간 확실히 분리되었던 분야를 넘나드는 포스트모던적 예술가의 탄생을 뜻했습니다.



“나는 어떤 순간을 기다리며 살지 않는다. 단지 이 순간을 최대한 충만하게 살 뿐이다.”

‘사회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 충돌할 때, 우리는 많은 경우 전자를 더 중요시 합니다. 익숙한 것에 관성이 붙어서이기도 하고, 혹여 손가락질 받지는 않을까, 사회에서 유리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오노 요코는 달랐습니다. 삶과 예술 모두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원하는 바를 강단 있게 밀어 붙였습니다. 종종 세상의 이해를 받지 못한 때에도 굴하지 않았어요. “매순간을 최대한 충만히 살았을 뿐”이라는 오노 요코의 말은 매 순간을 최대한 자기 자신으로 살았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매 순간을, 따라서 평생을 충만하게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 얼마나 낭만적인 말인지요.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사실 세간의 평가와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과 자기 확신이 수반되어야 함을 오노 요코의 삶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든 중반의 오노 요코는 현재도 여전히 ‘할머니’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자기답게 지내고 있습니다. 예순 후반에 열정적으로 소리를 내지르며 콘서트를 열고, 여느 아이돌 못지않은 현란한 춤을 추며 뮤직 비디오를 녹화하고,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사진을 찍지요.  아내, 엄마, 미술가, 음악가의 전형적 이미지를 흔들었던 오노 요코는 요즘 ‘할머니’라는 개념을 새로 쓰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녀의 행보가 여전히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 본 글은 지학사 고교독서평설 2020년 2월호에 게재한 내용을 조금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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