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 혹도 모자라 갑상선 혹까지 20대부터였나병원이랑은 친해서 얻을 거라고는 마음고생 몸고생뿐이기에 정말 이제는 그만 좀 병원에서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면 했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달리 병원에서는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는지 유방 외 별도로 발견된 혹으로 인해 추가 검사를 받게 되었다. 엄마도 그랬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많이 챙겨 먹은들 병원은 쉽사리 우리 모녀를 놓지 않는 듯했다. 이제 그만 병원에 오세요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의사 선생님 얘기에 허구한 날 병원에 가는 날을 보고 했던 우리 엄마 말이 스쳐 지나간다.
너 , 지랄병 고치지 않아서 병을 달고 다니는 거야.
엄마는 장사를 하러 나가고 휴가를 내고 혼자 맘모톰 수술을 받고 와서 방에 누워있던 나에게 장사를 끝내고 들어온 엄마가 얘기한다. 가족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혹이란 것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았었는데 혼자 혹을 달고 사는 나에게 엄마는 마음과는 다르게 이야기했다.
그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맞이로서 책임감 있게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도 벌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니 어느 것 하나 놓을 수 없었고 한꺼번에 하면서도 한 번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게 바쁘게 살면서도 그 속에 나는 없었다. 누가 나 더러 모든 걸 책임지라고 한 적도 없었고 다 잘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혼자 어깨를 누르고 있는 책임감이 불안함에 함께 휩싸이고 생각했던 일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진행이 되지 않으면 일이 안될 때마다 조바심에 떨며 매번 나를 더 몰아세웠다. 나 스스로를 내가 잘하고 있으니 괜찮아라고 말 한번 해 준 적 없이 몰아세우면 세울수록 나에게 남은 건 수많은 혹 일뿐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병원을 또 와야 하고 추가 검사에 따른 치료가 필요하단 말에 제풀에 주저앉아서 슬퍼했을지 모른다. 아니라 말하면서도 슬퍼하면서 제일먼저 찾았던 건 엄마였는데 엄마는 내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과 다른 말을 하긴 했지만 그다음 날이면 보글보글 돼지고기 김치찌개나 생일날 볼 수 있었던 돼지불고기 볶음 등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해 두고 먹으라 했다. 지지고 볶고 싸워도 내 자식 내 엄마니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마음과 다르게 이야기하는 엄마일지언정 엄마 손맛이 담긴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졌다.우는 자식의 목소리를 듣고 차가운 말 한마디로 울음을 그치게 했었지만 지나고 보니 어느 것 하나 엄마와의 추억이기에 잊을 수 없다.
안타깝게도이제는 아파도 엄마한테 전화 해 울 수가 없다. 치매로 아픈 엄마에게 전화로 속상한 이야기를 전달 한들 듣고 있는 엄마도 말하는 나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면 엄마를 찾아 속상한 것을 이야기해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결국 숙제는 나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인데 예전엔 힘들고 지치면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는 사실에 인정하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엄마 없이 혼자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1년째 의사로부터 속상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는다. 더 이상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엄마에게 풀기보다 나 자신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로 열지 못하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도 누군가의 엄마이기에 눈물로 보낼 시간에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살아온 나보다 살아갈 나와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힘들면 혼자 다
짊어 지려 하지 말고 쉬어가도 돼.
100세 인생. 이제 고작 40년 살았다. 누구도 나에게 그리 치열하게 살라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잘 사는 방법을 모른 채 치열하게 살아온 나 자신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지난날은 지금의 내가 있게 해 준 초석이기에 병원을 떠나고 싶었지만 떠나지 못하는 건 남은 60년을 더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일 뿐이라 생각하기로했다.
이렇게 오늘의 나는 서툴지만 하나씩 단단한 엄마가 되어 당당하게남은 인생을 살아갈 준비를 하기에 앞으로의 삶은 살아온 날보다 수 없이 빛나는 인생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