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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Mar 15. 2023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오늘도 무사히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아프던 날들이 종종 있었다. 먼 옛날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가까운 날들의 이야기 역시 아니다. 그래서다. 덤덤한 몇 줄의 문장으로 지난 일을 기록하려는 것은. 잊기에는 너무 선명하고 아프다고 하기에는 너무 흐릿하기에. 그럼으로 이것은 흔한 추억담도 아니고 처절한 비명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종종 아프던 날에는 한 가지 다짐으로 살았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까지, 사랑하는 이를 떠올렸다가 지울 때까지, 그때까지, 오늘도 무사히 보내자는 다짐.

그 다짐들이 모여 지금을 만들었다는 단순한 사실에 나는 감동한다. 나는 더 일찍 하직(下直)할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역시 다짐의 유효기간을 오늘로 둔 덕분이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삶이 내일이 없는 삶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나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았고, 그래서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매번 다녀왔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낙조(落照)를 뒤로하고 귀가할 때, 발걸음은 무겁고 지친 몸과 마음은 신음을 쏟아냈다. 곧잘 그랬다. 우울증은 하루치의 피곤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드는 병이다. 피로를 견디는 최소한의 힘마저 앗아가는 병. 그랬기에 내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은, 남보다 자주, 그리고 깊이 피곤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것. 그게 중요했다. 


이것은 피곤함을 견디며 노곤함을 이기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오늘도 무사히 살아온 내 삶의 기록이다. 이 기록이 오래 계속되길 빈다. 늘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기를, 항상 다짐을 지킬 수 있기를,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오늘도 무사하기를, 나는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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