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국제 행복의 날이다
당신이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국어사전을 펼쳐 ‘행복’이라는 단어를 찾았다. 국어사전을 뚫어질 듯 바라봤지만 행복이 추상명사라는 것만 알았을 뿐 과연 무슨 뜻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랬기에 나는 행복하지 않다기보다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그렇게 대답했다.
가만히 보니 당신 역시 모르는 눈치였다. 무릇 국어사전을 뒤지는 고루한 일은 작가들이나 하는 법. 당신은 행복이 뭔지는 몰라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어제 매운 떡볶이를 실컷 먹어서 그렇다고, 당신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 간단함 속에 단오함 역시 깃들어 있었다. 그렇지. 당신은 언제나 마음이 영근 사람이었고, 중심이 잘 잡힌 사람이었다. 비틀거리는 내가 기꺼이 기대고 싶은 사람.
내게 행복은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이었다. 물론 행복한 척 살았던 시기가 꽤 있었고, 나는 그 탓에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고 짐작한다. 그 시절의 나는 환한 미소와 함께 온몸으로 행복을 내뿜으며 살았다. 행복을 형용사처럼 사용했다. 화려한 것들은 끝내 찬란하게 끝이 맞이한다. 꽃잎이 떨어지는 건 누구도 막을 수 없듯, 나를 형용했던 성긴 행복은 곧 부스스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 행복을 모르고 살았다. 알고 싶다는 생각도 안 했다.
그러다가 당신을 만났다. 당신은 산책을 하는 게 행복이라 했고, 그렇게 해서 도착한 작은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게 또 행복이라 했다. 사진을 찍는 것도 행복이고, 맛있는 걸 먹는 것도 행복이며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에 누워 단잠을 자는 것도 행복이라 했다. 당신의 행복은, 그런 식으로 온통 동사였다. 당신은 말했다.
너랑 이야기하는 것도 행복이야.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행복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사실을.
그때부터 내 행복의 항목도 조금씩은 늘어갔다. ‘책을 읽는다’는 곧 행복해지다와 이어졌다. ‘음악을 듣는다’도 마찬가지였다. ‘당신과 대화를 나눈다’ 역시 행복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동사 속에서 행복을 배워갔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장 행복해진 순간에도 슬그머니 다가와 불행의 속삭이는 것이 바로 우울증이니까.
행복해져라.
그것이 당신이 내게 남긴 마지막 명령어였다. 나는 충직하고 충실한 부하처럼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동사를 쌓아 올리는 중이다. 어제는 새 옷을 샀다. 구름이 흘러가는 걸 관찰했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볼 빨간 아이들이 과자 나눠 먹는 걸 봤다. 그리고 또 글을 썼다.
나는 행복해지는 중이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