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앉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의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 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 선천성 그리움, 함민복 -
그리운 것들이 늘었다. 그만큼 잃은 게 많아서다. 그 중 가장 갈급했던 건 누군가의 따뜻한 포옹이었다. 백 마디 위로의 말보다 한 번의 부드러운 포옹이 더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안아 달라 말하기 쑥스러웠다. 나라는 인간을 사심 없이 안아줄 수 있는 이는 부모님뿐이라 생각했다. 두 분은 충분히 늙었고, 나는 그런 부모님께 내 우울증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들과 마주한다. 힘들다는 말로도 충분하지 않은 힘듦과 피곤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피곤함과 사랑한다는 말로도 다 전할 수 없는 사랑과 종종 마주하게 된다. 아! 언어의 한계여, 그 빈약함이여.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진실한 포옹이다. 몸은 말보다 훨씬 진실하고, 더 직접적으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꼭 끌어안았지만 심장을 포갤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해 선천성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인은 상대방을 얼마나 사랑하는 것일까? 나는 사랑 없는 포옹이라도 좋았다. 누군가와 안고 서로 등을 두드리며, 혹은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불안과 우울과 두려움을 달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허나, 누군가를 안아주는 일은 참으로 힘든 것.
둘 사이의 거리를 ‘제로’로 만들지 않고는 할 수 없기에 상대방을 위하는 진정한 마음이 없다면 따뜻한 포옹 역시 기대하기 힘들다. 팔을 벌린다, 안는다, 팔을 두른다, 서로의 체온을 느낀다, 서로의 심장박동 소리를 듣는다, 그러고는 말없이 툭툭 등을 두드린다.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자연스레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안아주고, 더 큰 병에 걸린 사람을 위해 제법 건강한 사람이 기꺼이 팔을 벌려주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조금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따뜻해지지 않을까. 많이 그리워하지 않을까.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내일 당장 죽는 이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