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멋져야 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가가 주인공인 영화나 드라마가 잘 없는 건 이 직업이 딱히 멋지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처럼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운동선수처럼 역동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역동적이라고 해봐야 기껏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타자를 치는 정도인데, 이마저도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니 영상물의 주인공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소설가가 작업하는 모습은 멋지지 않은 걸 넘어 안쓰럽기까지 하다.
분명 밤이다. 밤일 테다. 내가 알기로 소설가보다 더 올빼미족인 이들은 없으니까. 아무튼, 불 꺼진 방안에 스탠드 조명과 모니터 불빛만 파리하게 어둠을 밝히고 있다. 책상 한쪽에는 커피가 말라붙은 잔 아니면 찌그러진 에너지 드링크 캔이 뒹굴고 있을 터. 소설가의 천형이라 할 수 있는 스트레스성 탈모를 견뎌냈다면 키보드 주위에는 무수한 머리카락과 비듬이 떨어져 있으리라. 옷은 (그걸 제대로 입고 있다면) 목 부분이 늘어난 티셔츠가 전부일 테고, 낯빛은 어두우며 눈 밑은 퀭할 것이다. 소설가, 그중에서도 장르 소설가는 대략 이런 모습에서 더 추하거나 덜 추하거나로 나뉠 뿐 딱히 다른 모습은 없다. 그러니 누가 카메라 앵글에 담고 싶겠는가.
예전에, 그러니까 아주 먼 옛날 태초라 불러도 좋을 만한 그때에는 소설가가 초등학교 학생이 되고 싶은 직업 순위 10위 안에 들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라 불렀으며, 그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다는 게 아쉬운 사실이기는 한데 어쨌든 그랬다. 그 시절에는 소설가가 선생님과 더불어 명망 있는 직업이었다. 황금기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소설가가 글쟁이로 치부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장르 소설가라니, 그건 글쟁이 축에도 끼지 못했다. 장르 소설가라고 하면 거짓말로 범벅이 된 싸구려 이야기나 지어내서 파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불과 지난 세기의 말까지도 이 나라를 떠돌았다.
나는 단언하건대, 장르 소설가는 ‘거짓말로 범벅이 된 싸구려 이야기나 지어내서 파는 사람’이 아니다. 장르 소설가는, ‘거짓말로 범벅이 된 싸구려 이야기나 지어내서 못 파는 사람’을 일컫는다. 책은 좀처럼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젠장.
소설가가 안 멋진 이유를 대라면 책 한 권도 부족하겠지만, 몇 개만 더 설명하고 마무리하겠다.
소설가는 꽤 예민한 족속이다. 그들의 신경은 중세 시대 유럽을 누볐던 시궁쥐의 꼬리만큼이나 예민하게 발달 돼 있다. 경추의 모양새는 저 멀리 푸른 바다를 누비는 거북이와 닮았으나 그 일곱 개의 뼈가 떠받히는 머릿속 신경은 쥐와 흡사한 것이다. 예민함은 예술적 감각과 창의적 발상의 밑거름이 되지만 일상에서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한 말의 본질과 숨은 의도와 복선을 파헤치기 위해 곱씹고 또 곱씹다가 끝내 혼자 지쳐서 관계를 끝내버리는 그런 인간을 과연 누가 좋아할까? 연인이라면 과연 최악일 터. 굳이 장점을 찾자면 그래서 눈치가 빠르다는 건데, 이건 소설가의 실천력이 1마력(1마력은 1초 동안 75kg의 무게를 1m 높이로 들어 올리는 힘인데, 그게 가당키나 한가!)에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하자면 알고도 그대로 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다들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소설가는 화가 많다. 짜증도 많고, 걱정도 차고 넘치며, 그렇기에 쉬이 피곤해한다. 멋지지 않다. 아무렴, 멋진 사람이라면 모든 문제 앞에서 호탕하게 웃고 넘겨야 하는 것이거늘.
또 하나의 이유는 소설가가 의뭉스럽다는 데 있다. 본디 소설가, 특히 그중에서도 장르 소설가는 상상이라고 쓰고 자기만의 생각이라고 독해해야 하는 세계에 빠져 지내는 경우가 많다. SF 소설가는 모든 걸 다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고, 로맨스 소설가는 어떤 경우든 키스하게 만들고 싶어 애가 달아한다. 호러 미스터리 쪽은 어떠냐고? 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당신이 짐작하는 그게 정확하다. 어쨌든 호러 소설가의 머릿속에는 붉은색이 꽤 지배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핏빛 말이다. 이러다 보니 장르 소설가는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혼자 상상에 빠져 남이 안 하는 생각을 하며 이죽이죽 웃는 게 바로 장르 소설가인 것이다. 그래 놓고는 좀처럼 자기 상상을 말로 꺼내 놓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게 아이디어고 결국 그거로 소설을 써야 하니 꼭꼭 숨겨두는 건데, 이게 참 무의미한 일임은 앞서 책이 팔리지 않음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하겠다.
몇 가지 이유만 보더라도 소설가가 되는 건 득이 아니라 손해가 되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장르 소설가는 더욱 그렇다. 일반 소설가가 문학과 예술에 종사한다는 명예라도 얻을 때, 장로 소설가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전에 북토크에서 있었던 일이다. 몇 안 되는 순수 독자와 십여 명 남짓한 업계 관계자(이에 관해서도 나중에 말하겠다)가 자리한 그 북토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질문한 이는 독자였다.
“하필 왜 그런 소설을 쓰세요?”
‘다른 방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꼭’이라는 뜻의 부사어 ‘하필’과 ‘그런 소설’이 만나니 내가 아주 잘못된 선택을 한 것만 같은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 독자의 질문을 풀어서 해석하자면(예민하게도) 이런 것이었다.
“왜 아름답고 싱그러우며 찬란한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 찬 이야기가 아니라 어둡고 잔인하며 끝내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마는 소설을 쓰시는 거죠, 작가님?”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무튼 그럴싸한 거짓말 몇 마디를 했을 텐데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장르 소설가에게까지 돌아올 명예는 없다. 지금은 그 위상이 예전에 비해 많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몇몇 장르는 터부시되는 게 사실이고, 아쉽게도 나는 그 ‘몇몇’ 장르에 속하는 소설가다.
현실이 이러니 나는 누구에게든 쉽게 이 직업을 추천하거나 권유하지 못한다. 한 명을 끌어들이면 직급이 올라가는 다단계도 아니니 양심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장르 소설 창작 수업을 진행하는 주제에 정작 본인은 불만투성이니 나도 좋은 선생은 아니지 싶다. 그럼에도 이런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돈도 명예도, 그리고 멋짐도 포기하는 대신에 재미를 선택한다면 기꺼이 장르 소설가의 길에 도전해 보시라!
나는 2008년에 데뷔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제법 세월이 흘렀다. 이 글이 (운 좋게) 출간될 지음에는 거의 데뷔 20년 차 정도가 되어 있을 테니 고인 물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다. 한 가지 일을 20년 가까이 한다는 건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다른 직업을 가진 채 살면서 돈과 명예, 그리고 멋짐까지 다 얻었을 다중 우주의 나를 생각하며 매일 후회하는 데도 나는 20년 동안 같은 일을 했다. 투철한 사명감?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하지. 뛰어난 재능? 그런 게 있었다면 좋았을걸…….
다 없어도 하나는 있었다. 그게 바로 재미였다. 소설 쓰는 일은 재미있다. 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끝내주게 재미있다. 다른 작가의 소설을 읽은 일보다, 평점 좋은 영화를 보는 일보다, 당연하게도 드라마나 만화를 보는 일보다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게 백배는 더 재미있다. 나는 2008년에 그걸 깨닫고 말았다, 아뿔싸.
캐릭터를 창조한다. 그 캐릭터가 놀 공간을 만든다. 캐릭터가 공간 속에서 겪게 될 사건을 구상한다. 그러고는 짜잔, 마법이 완성되기까지 기다릴 뿐이다. 기다림 끝에는 창조의 기쁨이 있다. 내가 만든 허구의 인물이 내가 만든 허구의 세상에서 내가 만든 허구의 사건을 경험하는데 이걸 다른 사람이 읽어준다고? 세상에 이것보다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내 데뷔작인 <선잠>은 당시 살던 고시원에서 완성했다. 그때는 기자였다. 부산 토박이가 가진 돈 없이 갑자기 서울로 취직해 올라왔을 때 묵을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고, 나는 그중 고시원을 선택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옆방에서 항의하는 그런 곳이었다. 퇴근하면 나는 노트북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낡은 평상이 있었다. 다리 네 개 중 하나가 짧아 언제나 기우뚱하게 서 있던 평상. 거기에 앉아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나는 소설을 썼다. 호러 소설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의 미행에 시달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해 봄 저녁노을이 지는 걸 보며 열심히 썼다. 메마른 바람이 자주 불었고 저 멀리 보이던 북한산은 매일 조금씩 색을 바꿔갔으며 달과 별이 떴고 가끔은 기묘한 모양의 구름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가곤 했다. 그 모든 것에 둘러싸여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지금도 기억한다. 똑똑히, 아주 선명하게. 내 데뷔작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던 때의 느낌을……. 너무 재미있어서 더 쓰고 싶은 마음과 이쯤에서 그만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해변을 더듬는 파도처럼 내 머릿속을 번갈아 가며 왔다 갔다 했다. 제목은 <선잠>이었지만 내게 그 작품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너는 앞으로 소설가로 살게 될 것이다.
그 메시지 속에 다음과 같은 의미가 숨어 있다는 건 훨씬 나중에,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너는 앞으로 돈도 명예도 없고, 심지어 멋지지도 않은 소설가로 살게 될 것이다. 지금 아는 걸 그때 이미 알았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선잠>을 완성했을 테고 결국 소설가의 길을 걸었으리라. 바뀌는 건 없다. 운명을 바꾸기에는 소설 쓰는 일이 너무나 재미있다. 이 직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소설가가 안 멋진 이유를 백서른한 가지쯤 더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소설가로 살아가는 이유는 재미, 고작 하나다. 이 불균형 속에서 내가 감히 덧붙일 수 있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랑은 백 개의 단점보다 하나의 장점에 홀려서 피어난다는 아주 오래된 진실뿐이다. 그리고…… 한 번 사랑에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나 당신, 혹은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을 그 누군가처럼.
나는 또 책상 앞에 앉는다. 노트북을 연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당연하게도!)를 입고 거북이의 그것과 같은 자세로 더듬더듬 자판을 두드린다. 가끔 에너지 드링크를 홀짝이면서(다이어트를 위해 그나마 제로 음료를 선택한다) 밤을 지새운다. 잘 써지는 날도,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당연하다. 세상일이란 게 모두 잘 풀릴 수만은 없다는 걸 작품을 한 권이라도 내 본 소설가는 다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아마 앞으로도 몇십 년은 더 이렇게 생활하리라. 왜냐고? 재미있으니까. 답은 그것뿐. 진실은…… 언제나 단순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