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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업타운걸 Apr 24. 2021

Enivrez-vous: 지금이 몇시냐고 묻는다면

취해야 할 시간, 작은 와인 클럽 이야기

공부를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위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내게는 좋은 일들도 있었다.


쥐가 들어온 이튿날 아침, 울다 부은 눈으로 미팅에 갔다가 한 친구가 와인 클럽을 시작한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 전에 소믈리에 자격증을 땄는데, 꾸준히 와인 맛을 보는 연습을 할 친구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같이 소믈리에 수업을 들었던 이들은 요식업 종사자들인지라 저녁 늦게, 주말까지도 일을 하기 때문에 같이 연습하기가 어려워서 자신과 생활 패턴이 비슷한 대학원생들과 클럽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너도 같이 하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상실감이나 무력감으로부터 나의 주의를 분산시킬 무언가가, 새롭게 호기심을 자극할 무언가가 절실했다. 이전의 나라면 와인 클럽이라는 것이 내 처지에 맞지 않는 사치로 느껴져 머뭇거리거나 죄책감을 느꼈을 텐데 그 날은 뭔가에 홀린듯 "그래!" 라고 그 자리에서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소믈리에 자격증이 있는 그와 그의 다른 친구, 나와 내 동기, 이렇게 네 명이 모였다. 우리의 첫 모임은 소믈리에 자격증이 있는 친구의 집에서 열렸다. 따뜻한 조명 아래 빨간색 식탁보를 깔고 각자가 가져온 먹을거리를 펼쳤다. 브레드 스틱, 포도와 올리브, 프로슈토와 브리 치즈, 스위트피로 만든 디핑 소스, 타라마살라타 (생선알이 들어간 그리스식 디핑 소스), 그리고 크래커까지.


첫 시간은 꽤 진지하게 진행됐다. 맛과 색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지역에 대해서도 조금 공부했다. 그 날 아마 우리는 루아르 계곡의 와인을 마셨던 것 같다. 지역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는 한 병씩 차례로 맛보면서 각자가 관찰한 색깔과 경험한 맛과 향을 말로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답은 없었다. 틀릴 걱정하지 않고 내가 어떤 것을 느꼈는지 말하는 것이 우리의 규칙이었다.


늘 정답이 있는 질문에 익숙했던 내게, 우리의 첫 와인 모임은 문화 충격과도 같았다.


이 모임이 내게 주는 가르침은 그런 것이었다. 내 감각을 믿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 틀리거나 실수할까봐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의 감각만큼 친구의 감각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 내가 "이런 맛과 향이 나" 하고 말하면, 친구들은 눈을 크게 치켜뜨고 "와, 그건 생각 못해봤는데!" "다시 먹어보니 그런 것 같다!" 하고 다시 술을 홀짝였다. 나도 친구들의 말을 듣고는 그들이 찾아낸 맛과 향을 느껴보려고 애썼다. 그들의 설명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가 있어서 친구들의 말을 듣고 다시 술을 마셔보면, 분명 같은 술인데도 새로운 맛과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미각이나 후각에는 무심했는지 깨달았다. 나의 세계는 보이고 들리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내게 음식의 맛과 향을 표현하는 어휘가 그렇게 부족하다는 것도 그 날 처음 알게됐다. 무형의 감각에 언어로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전까지는 맛을 표현할 때 “대박!” “맛있다!” 라는 말 밖에는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냄새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를 음미하고 생각해서 묘사하는 일은 낯설고 어려운 동시에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맛이나 향 같은 것은 나만의 감각이라 너무 잘 알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천천히 오래 머금고 생각해야 형태가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걸음마를 새로 떼는 것 같았다. 와인 클럽을 만나 나의 세상은 조금 더 향긋하고 풍요로워졌다.


이렇게 친구들과 맛과 향에 대해 이야기를 실컷 나누었지만 와인에 대한 지식이 엄청 늘었다거나 고급 취향을 가지게 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라벨이 예쁘고 재미있는 와인이, 저렴하게 많이 마실 수 있는 와인이 좋다. 무슨 와인이 좋은 건데. 어디 어디에서 난 무슨 무슨 와인은 이런 저런 특징을 가졌다던데. 와인을 먹는 중에 그런 이야기들이 오가면 책도 찾아보고 열심히 받아 적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나에게 그 시간은 나의 여러 감각에 대해 새롭게 배우고 친구들과 교감하는 시간에 더 가까웠으니까. 서로 어떤 것을 다르게 느꼈는지 눈 맞추며 이야기하고 귀기울여 들어주는 시간이었으니까. 와인 클럽에서 나는 와인 말고 다른 것들을 더 많이 배웠다.

2-3주에 한 번씩 금요일마다 우리는 지역이나 품종을 정해서 각자 와인 한 병씩을 들고 모였다. 그 외의 준비물은 각자가 먹고 싶은 간단한 먹거리와 이야깃거리. 맛을 한 차례 보고 나면 우리는 와인 얘기 말고 사는 얘기를 했다. 요즘 보는 드라마, 요즘 듣는 팟캐스트, 최근에 해 먹은 음식 레시피 같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정치나 시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러다 보면 어떤 와인이 제일 맛있었는지, 어떤 와인에서 어떤 맛이 났는지 따위는 다 잊어버리기 마련이었다. 술도 술이지만 내가 특히 좋아한 것은 새로운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추운 날 친구가 뚝딱 끓여준 토마토 소스 베이스의 렌틸 수프, 우리가 모이는 시간에 맞춰 토스터 오븐에서 꺼낸 말랑한 흰 빵, 구운 복숭아를 얹은 늦여름의 샐러드, 있는 재료로 대충 휘리릭 만들어낸 새우 스캠피 파스타까지. 와인 라벨보다는 친구들의 온기와 이야기가 베어있는 음식들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모임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많이 달라졌다. 이들과 만나면서 나는 그 전까지 내가 나를 너무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인지, 나는 어떤 것을 할 때 즐겁고 행복한지 돌아본 적 없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과 새로운 것을 먹고 마시며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나의 감각과 감정에 집중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내게 치유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나의 감각과 감정에 충분한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하면서 나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고 무게중심을 전보다 잘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힘들거나 아프면 쉬고, 일주일에 하루, 하루 중에 몇 시간은 온전히 나만을 위해 쓸 것. 그래도 괜찮은 게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것들.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난 뒤에 같은 친구들을 반복해서 주기적으로 만나는 것이 당시의 내게 큰 안정감을 주었던 것 같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라 와인 클럽을 만나고 난 밤에는 정말로 꼭 마음이 따뜻했다. 덕분에 나는 그 전보다 더 씩씩하고 밝아졌다.


햇수로 4년차, 지금은 네 명 모두 다른 도시에 살고 있어 더 이상 같은 와인을 마시기 어려워졌지만 클럽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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