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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업타운걸 Feb 11. 2021

부엌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은

반가운 손님들

이사를 한 첫 해에는 한국에서 손님이 몇 다녀가면서 각자의 손길로 부엌에 온기를 불어 넣어주고 갔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장 먼저 친구들이 휴가 날짜를 맞춰 놀러왔다. 우리 집에 모여서 다같이 비행기를 타고 플로리다로 갈 계획이었다. 친한 언니도 얼굴을 볼 겸 우리 집으로 왔다. 비행기를 타기 전날, 다섯 명이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콧구멍 만한’ 작은 집이 북적였다. 캐리어를 펼치면 부엌이 꽉 찼다. 방 역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바닥에 놓인 매트리스에 우리는 가로로 누워 잤다.


친구들은 이사 기념으로 한국에서 직접 만든 주방용 수건, 국물다시팩 같은 것들을 갖다주었고, 맛있는 거 담아 먹으라고 귀여운 접시도 사주고 갔다. 어설프게 꾸려놓은 뜨내기의 부엌 살림에 처음으로 나만의 "때깔"이라는 게 생긴 것 같았다. 쓸 때마다, 꺼내 먹을 때마다 오래오래 생각이 났다.


가을에는 엄마가 왔다. 엄마는 이것저것 싸들고 와서 모자란 살림을 채워 주었고, 같이 외출을 하면 집에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늘 챙겼다. 엄마가 와있는 동안 살림도 풍성해졌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차려져 있던 아침상이었다. 엄마는 자주 김밥을 말아주었다.


내가 아직 어리던 날에 엄마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소풍날이나 운동회, 백일장, 사생대회 같은 날이면 엄마는 꼭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김밥을 싸고 출근했다. 자기는 손이 느려서 그 시간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설명이었다. 한 번 김밥을 쌀 때면 엄마는 꼭 열 줄을 쌌다. 이틀은 먹을 만큼. 김밥 전문점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도 동네에는 김밥을 말아 파는 아줌마가 있었지만, 엄마는 항상 고집스럽게 직접 김밥을 싸 주었다. 그 때의 엄마는 늘 김밥같이 손이 많이 가는 걸 뚝딱뚝딱 해내는 다른 엄마들이 부럽다고 했다. 자기도 언젠가는 척척 해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우리 가족이 외국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여행을 가거나 집에 손님이 올 때면 엄마는 억척스럽게 김밥을 쌌는데, 나는 그 김밥이 매번 좋았다. 엄마가 직장에 다니는 동안에 엄마 김밥은 소풍날에만 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는데, 그 때는 자주 먹을 수가 있었으니까. 빨간 무말랭이만 넣고 싼 김밥부터, 쉽게 무르는 외국 시금치 대신 깍지콩을 넣고 싼 김밥까지. 어느덧 엄마는 소원대로 김밥말기 선수가 되어 있었다.


뉴욕에 와서도 엄마는 김밥을 쌌다. 아침에 식탁에 앉으면 엄마는 뿌듯한 표정으로 접시를 내 앞에 밀어 놓곤 했다. 소세지랑 아스파라거스, 깍지콩 같은 것들이 들어간 김밥이었다. 있는 재료로 뚝딱, 먹을 만큼만 싼 김밥. 점심에 먹을 김밥도 노란 도시락 통에 가지런히 담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밥을 들고 집을 나설 때면 나는 엄마가 뉴욕에 온 게 아니라 내가 서울에 온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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