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동기들과의 특별한 시간
대학원 첫 해에 나는 늘 혼이 반쯤 나가있었다. 원래 낯을 가렸지만 이 때는 의기소침하기도 해서, 나는 말수가 특히 적었다. 거의 매일 수업을 같이 들었는데도 일 년이 다 가도록 동기들과 친해지지 못했다.
우리가 학교 바깥에서 처음 다같이 모인 것은 한 해가 다 지나고 나서였다. 이스트 빌리지의 작은 바 구석 테이블에서 우리가 1년차를 버틴 것을 축하하던 날, 나는 처음으로 모두에게 박사 1년차가 힘든 시기였다는 것을 알게됐고 그들과 마음으로 조금 더 가까워졌다.
내가 입학하던 해부터 우리 과에서는 외국인 학생 비율을 늘려서 우리 동기 중에는 나 말고도 외국인이 여럿 있었다. 나는 동기들 가운데서 미국인 두명과 뉴질랜드, 터키, 인도네시아에서 온 친구들과 친해졌는데 이들은 모두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고 연령대도 다양했다. 특히 뉴질랜드와 터키에서 온 친구들은 같은 기숙사에 살아서 서로 더 의지하고 같이 밥도 많이 먹었다. 이들은 나를 가까이에서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3년차로 넘어가던 여름, 나는 동기 둘과 함께 첫 번째 종합 시험을 준비했다. 도서관 문 여는 시간에 셋이 모여 각자 공부를 하다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잠깐씩 쉬었다. 오후가 되면 모의 시험을 보았고, 가끔은 학교 근처 술집 테라스에서 복숭아가 들어간 상그리아나 맥주 같은 것을 마시며 복습을 했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우리 셋은 나란히 시험을 통과했다.
큰 허들을 하나 넘고 나서 우리에게는 잠깐 여유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 시험을 통과하고 맞은 내 생일날, 그 때 나의 룸메이트이기도 했던 터키에서 온 동기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토마토, 양파, 깍지콩을 넣고 푹 익힌 요리 말고도 생전 처음 먹어보는 렌틸콩으로 만든 볼, 당근 요거트 딥 같은 것을 만들어주었다. 영하 17도의 날씨였지만 동기들이 모두 와주었고 이들과 한 식탁에 둘러앉아 먹는 저녁밥은 따뜻했다.
그 생일상을 계기로 우리는 그 해에 동기들의 집에서 돌아가면서 홈파티를 했다. 별 일 없이 모여서 그들 출신 지역의 시그니처 메뉴를 먹었다. 텍사스 출신의 친구는 그린 살사, 엔칠라다 같은 텍스-멕스 메뉴로 밥을 차려주었고, 인도네시아에서 온 친구는 볶음밥과 피시볼을 만들어 주었다. 다른 미국인 친구의 루프탑에서 바베큐 파티를 하기도 했다. 그 해 여름 나도 나만의 집이 생겼지만 여섯 명이 모여 밥을 먹을 만한 살림이 못되어서 나는 친구들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한국 음식을 해 가거나 술을 사갔다.
그 파티들은 그냥 그 자체로도 특별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우리가 다같이 모여 어울린 마지막 해여서 더욱 특별했다. 그 해가 지나고, 친하게 지내던 여섯 명 가운데 네 명이 시차를 두고 이 도시를 떠났다. 이따금 다시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 때 이후로 여섯 명이 한 자리에 모인 적은 없었다.
우리 또 다같이 그 때처럼 한 식탁에 둘러앉아서 밥 먹을 수 있을까. 한국으로 가는 편도 비행기 티켓을 사고 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