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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업타운걸 Feb 17. 2021

그거 또 해주면 안돼?

모두가 사랑해 준 나의 시그니처 메뉴

봄에 한 학년을 시작해 겨울에 마무리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새 학년이 가을에 시작해 봄에 끝난다. 해가 짧아지고 날씨가 추워지는 계절에 새 학년을 시작해서 포근한 계절이 되어 한 학년을 마치는 이런 미국식 학제는 내게 오랫동안 아주 낯설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가을 학기가 시작하면 새롭게 한 학년을 시작했으니 힘내야지! 의욕이 넘쳤지만 그런 마음가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창문이 없는 강의실에서 오후 수업을 듣고 나오면 밖은 이미 캄캄했다. 공기는 차갑고 몸은 움츠려 들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무렵은 안그래도 늘 학기 중 가장 바쁜 시기였는데, 날씨와 계절 때문에 나는 이 때 더욱 쉽게 지치고 사기가 꺾였다.  


반대로 봄 학기가 되면 해가 길어지고 날이 따뜻해지는 만큼 작은 일에도 마음이 설렜다. 자꾸만 바깥으로 달아나는 마음을 붙들어 책상에 앉히기 바빠서 차분히 한 학년을 마무리짓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봄학기를 마치고 나면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 나는 종강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를 테면 예쁜 날씨, 서울로 가는 비행기, 그리고 야외에서 하는 바베큐 파티 같은 것들. 그래서 가을에 새 학년을 시작하는 것에는 불만이 많았지만 봄에 학년을 마무리하는 것은 어쩐지 설레고 신나는 데가 있었다.


“옥상에서 바베큐 할 건데 올 수 있는 사람?”

미국에서의 두 번째 해를 마친 봄. 첫 번째 바베큐 파티가 잡혔다. 여름 방학을 맞아 사람들이 나처럼 집으로 돌아가거나 휴가를 떠나기 전에 얼굴도 볼 겸 동기가 학과 사람들을 모았다.


바베큐를 하면 보통 호스트가 고기랑 구워먹을 야채 같은 것을 몇 가지 준비하고, 다른 사람들이 샐러드, 디저트며 술 같은 것들을 가져왔다. 나는 이메일을 받고 무엇을 가져갈까 고민했다. 첫 바베큐이니만큼 뭔가 특별한 것을 가져가고 싶었다.


바베큐 하면 코리안 바베큐지! 그리고 코리안 바베큐 하면 삼겹살이지만… 그냥 생고기를 가져가는 건 어쩐지 좀 아쉬웠다. 삼겹살을 맛있게 먹으려면 쌈이랑 이것저것 다른 게 필요한 게 많았다. 요리같아 보이려면 뭘 가져가야 하나?


한국인이 아닌 친구들에게 단일 메뉴로 “코리안 바베큐”를 맛보이고 싶어서 나는 삼겹살을 고추장에 재웠다. 그러면 쌈이며 파절이 같은 것 없이 그냥 그것만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다.


코 끝에서부터 봄기운이 느껴지던 오월 어느 날, 나는 전날 재워둔 고기를 가지고 친구네 옥상으로 갔다. 각종 주전부리를 비롯해 빵, 구운 옥수수, 샐러드, … 넓은 식탁이 음식으로 가득 찼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친구가 간장과 라임즙에 재운 닭가슴살과 고추장 삼겹살을 구워서 내왔다.  


“뭘 넣었는데 이런 맛이 나는 거야?” “이렇게 썬 고기는 어디서 사?” 첫 고추장 삼겹살은 대성공이었다. 삼겹살에 매콤달콤한 고추장 양념을 했으니 맛이 없을 리가 없다는 건 알았지만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 날 하도 맛있다는 사람들의 말에 몇 년째 채식을 하던 한 친구도 결국 고추장 삼겹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고추장 삼겹살은 학과 친구들에게 꽤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 그 이후에 바베큐 파티를 하게 되면 애들이 꼭 “그거 해달라”고 했다. 고기값을 주면서 제발 많이 만들어오라고 하는 이도 있었고, 야무지게 접시에 묻은 양념에 빵을 찍어먹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 파티에도, 다음 다음 파티에도 나는 부지런히 삼겹살을 재워갔다. 나도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가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한 번 먹어본 애들이 “그 코리안 바베큐”가 또 먹고 싶다고 했고, 안 먹어 본 애들한테는 “그거 꼭 먹어봐야 한다”고 해서 내게는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다. 어느덧 고추장 삼겹살은 나의 시그니처 메뉴가 되어 있었다. 메모리얼 데이며 독립 기념일, 누구의 생일, 누구의 송별회 … 모이는 이유와 멤버는 매번 바뀌어도 고추장 삼겹살만큼은 고정메뉴였다.



10월 어느 서늘한 날 해질녘, 우리가 첫 바베큐를 했던 옥상에서 친구가 오랜만에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뉴욕에 남은 내 유일한 동기인 그가 고추장 삼겹살을 해 달라고 해서 나는 모처럼 삼겹살을 잔뜩 주문했다.


양념에 재운 고기를 등에 메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나는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찡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지. 졸업을 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뉴욕을 떠난 이들이 많아져서 이제 내 고추장 삼겹살 맛을 아는 학과 친구들은 뉴욕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우리의 마지막 바베큐 이후로 누군가와 모여 밥먹는 것은 낯설고 위험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 날, 고추장 삼겹살을 한 접시 가득 구워서 테이블에 앉은 친구는 요맘때가 되면 이게 생각나더라고 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변하지 않는 무언가 있어서 너무 기쁘다고 했다. 익숙한 맛으로 다시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라고. 내가 선물한 “아는 맛”을 친구가 기억해주고 아껴주어서 고마웠다. 내가 알고 좋아하는 맛이 어느 새 내 친구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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