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안 소시지, 브로콜리 라브 그리고 오레키에트
뉴욕에는 먼저 유학을 온 사촌 언니가 살고 있었다. 각자 바빠서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날이면 언니는 꼭 나를 챙겼다. 어느 해의 땡스기빙, 또 다른 해의 크리스마스 같은 굵직한 날들에 언니와 밥을 먹은 기억이 있다. 그것 말고도 언니는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꼭 나를 불렀다. 마음에 여유가 없던 유학 초기의 나는 평소에 언니한테 연락도 제대로 못하고 지냈으므로 그 일들을 핑계삼아 언니를 보러 가고는 했다. 한동안 언니는 내가 학교 바깥에서 아는 유일한 사람이자, 학교 바깥의 사람들을 만나는 유일한 창구였다. 내성적인 나와는 달리 언니는 발도 넓고 사교적이어서 언니가 부르는 곳에 가면 늘 재미있는 사람들, 재미있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모처럼 느끼는 학교 밖 공기는 늘 신선했다. 언니 곁에서 나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대학원생으로서의 내 모습을 잠시 잊고 서울에서의 내 모습, 가족과 있을 때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
내가 학점 이수를 마칠 무렵, 언니는 공부를 마쳤다. 유독 춥고 긴 겨울이 가고 마침내 뉴욕에 봄이 온 것 같았던 어느 해 3월의 마지막 날. 나는 언니의 렉쳐 퍼포먼스에 앉아있었다. 내가 졸업 공연을 하는 것처럼 떨리고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가족 대표로 그 자리에 앉아 언니가 인생의 한 챕터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을 지켜볼 수 있어 벅찬 마음이 드는 한편으로, 언니의 자리에 나를 대입해보면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공부를 끝내는 마음은, 한 시절과 작별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들을 했다. 언니가 논문 내용을 요약한 강의를 마치고 conclusion이라고 써 있는 슬라이드 옆에서 연주하던 모습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언니를 통해서 나는 음악이 "듣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배웠다. 연주를 할 때면 언니가 소리 뿐 아니라 표정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그 날은 연주를 보는 내내 특히 더 마음이 찡했다. 무대 위에서의 빛나는 모습에 그 자리에 서기까지 긴장하고 고생한 모습이 겹쳐 보여서, 그래서였겠지. 몸도, 마음도 너무 고생 많았다는 걸 잘 알아서.
연주를 들으며 언니가 곧 서울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나는 어쩐지 마음이 허전했다. 언젠가 올 순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그 순간이 빨리 온 것 같았다.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특별한 날 보통날 모두 언니가 챙겨주어 늘 고맙고 든든했는데. 어떤 크리스마스, 어떤 땡스기빙, 어떤 주말 그리고 어떤 저녁 - 유학 생활의 크고 작은 모퉁이마다 언니가 곁에 있어 정말 좋았다. 나는 낯도 가릴 뿐더러 늘 누군가 들고 나는 이 도시에서 사람들에게 마음 내어주는 일에 내내 인색했는데, 언니가 지어놓은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는 쉽게 긴장을 풀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만남에도 썩 잘 스며들 수 있었으니까.
함께 뉴욕에 있었던 시간을 통틀어서, 언니가 한국에 돌아가기 직전에 우리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같이 여행도 가고, 브런치도 먹고, 술도 한 잔 하고.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깊이 나누는 대화들을 통해, 나는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언니와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 가기 전에 언니가 마지막으로 해주었던 음식은 “이탈리안 소시지와 브로콜리 라브를 넣은 오레키에트”라는 제법 거창한 이름의 파스타였는데, 너무 맛있어서 나는 언니가 도시를 떠나고 난 후에도 이 파스타를 자주 만들어 먹었다. 향긋한 이탈리안 소시지와 쌉쌀한 맛이 나는 브로콜리 라브가 어우러진 이 파스타는 식어도 맛있어서, 나는 이걸 한 번에 잔뜩 만들어두고 도시락으로 챙겨다니곤 했다. 언니가 근사하게 차려주었던 기억 덕분에 혼자서 식은 도시락을 먹을 때에도 파스타에는 어쩐지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