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도착한지 두 달, 수화기 너머 영어의 습격
워킹홀리데이 제도를 이용해 영국에서 머물렀던 일년 반.
새로운 공간에서 낯선 일들을 겪으며 천천히 스며드는 여행인 듯 삶인 일상의 기록을 담습니다.
1.
나의 고모 이야기
나의 둘째 고모는 아르헨티나에 30년 가까이 살고 계신다.
88올림픽이 끝나고 남미에서 대대적인 투자이민을 유치할 때쯤에 인테리어 일을 하시던 고모부와 사촌 언니 둘을 데리고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곳으로 떠나셨다.
아주 먼 나라.
산 넘고 물 건너의 정도가 아니라 비행기를 몇 번씩 갈아타고 일본, 미국 등을 경유해야 하기에 고모의 존재는 눈에서 멀어진 만큼 마음에서도 멀찌감치 떨어졌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고모를 만난 기억은 한 두 번쯤. 고모를 만난 기억은 없지만 민망하게도 당시에 고모가 한국에 오면 지금은 슈퍼마켓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넛텔라(Nutella)와 프로폴리스 벌꿀캔디, 이과수 커피(Iguacu)를 몇 통씩 가져다 주셨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나는 대학생 때 브라질에 교환학생을 떠났고, 대학 동기 한 명과 몇몇 도시를 여행하던 중 고모가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의 수도>에 가게 되어 신세를 질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넘었으니 적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적지 않은 충격은 바로 우리 고모였다.
스페인어를 전혀 할 줄 모르셔서 전화로 택시를 부를 때에도 고모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우체부나 관공서에서 직원이 집을 방문하더라도 대화가 전혀 이어질 수 없으니 고모부가 부재중일 때에는 고모는 집에 있어도 없는 척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나를 더 충격에 몰아 넣은 것은 고모의 태도였다.
고모가 사는 동네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
한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을 주로 이용하시고 고모부와 대부분 생활하니 본인이 나서서 대화를 할 일이 거의 없다고 하셨다.
이건 2006년에 쉰 살이 넘었던 나의 고모 이야기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어쨌든. 나 홀로 워킹홀리데이로 영국에 가서 시급한 것 중에 하나가 "영어" 였다.
2.
습격
“삐릭” “삐릭 삐릭”
전화벨이 신경질적으로 울려댄다.
내 옆자리 전화이다. 왜 그런지 전화만 오면 자리에 사람이 없고 전화는 계속 울어대는데 정작 아무도 대신 그 전화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영국에 머문 지 두 달이 조금 넘었고 그새 난 런던에서 ‘밀톤케인즈’라는 도시로 새롭게 얻은 일자리를 위해 이사를 했다. 이 곳에서 일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났고 내 책상 맞은편에 앉은 직원은 콜센터와 같은 업무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이 리테일러들의 제품 리턴과 관련된 문의나 반품이 되지 않는 제품의 반품을 요청하기 위한 전화이기에, 좋은 일로 걸려오는 일이 가뭄에 콩 나듯 함은 미루어 짐작이 쉬웠다.
영국에 온지 두 달쯤 뒤에 행운인지 아닌지 모를 끈질긴 담당자의 면접 요청으로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또 버스를 갈아타고 구글 지도 위에서 우편번호만 가지고 수십 분을 헤매어 찾은 건물에서 간단한 한국인 매니저와의 인터뷰, 그리고 더욱 간단했지만 식은땀이 싸하게 등 전체를 메우게 한 현지 직원들과의 영어 인터뷰를 겪고 나는 드디어 정식으로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한국의 전자제품 기업의 영국 법인 내 서비스사업부 일을 하게 되었고, 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데이터를 분석하여 트렌드를 추출하는 일이 내가 하는 대부분의 것이었고 한국에서 직장을 다닐 때에 하던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아 업무에 적응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가능했다. 오히려 업무의 난이도나 양은 한국에서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수준이어서 업무만 놓고 따져보면 꿈의 직장과도 같았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건 업무가 아니었다. 영국에 도착한지 세 달도 채 되지 않은 내게 가장 큰 두려움이자 사무실에서 숨을 쉬고 있는 시간이면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만든 건 바로,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가늘건 쇳소리가 섞여있건 느리건 젊건 심기가 불편하건 내게 매한가지다.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음성은 들리는데 나는 열에 서너 단어들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으니 질문에 코가 뻥 뚫리게 시원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니 갓 입사한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언어 자체를 알아듣지도 못하니 울리는 전화를 내가 받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두 세 번 질문 내용을 되물으며 도움을 청하다간 결국 동료들에게 전화를 건네는 일이 일쑤였다. 친해질 틈도 없이 나는 민폐의 여왕으로 빠르게 등극했다.
고객 응대 전화를 담당하는 직원이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나는 초조해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두 눈은 내 몸뚱이 앞에 있는 두 대의 모니터에 꽂혀 있지만 온 몸의 신경은 정작 오롯이 전화기를 향했다. 전화를 받는 직원이 돌아오기까지 전화벨이 울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조용하던 전화기는 담당자가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는 순간부터 서럽게 울어댔다.
3.
영국에서 살려면 영어가 필요한가
나는 대한민국에서 중학교 1학년, 그러니까 14살부터 정규 수업으로 영어를 배운 세대이고, 시장에서 "How much is this?"를 해야 하는 뻔한 래퍼토리의 지문을 가지고 공부를 해왔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가게에서 How much is it을 말 할 공간이 없게 모든 것이 정찰제이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셀프 계산대를 이용하면 계산대의 점원과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 교통 티켓은 기계에서 끊고, Oyster card(런던 교통카드)도 기계에서 충전하면 그만이다. 한 밤 중에 피자가 먹고 싶어도 온라인 홈페이지에 들어가 주문을 하면 되고, 먹고 쓰고 사는 데에 영어를 하지 못해도 어려움을 많이 느끼지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런 속에서 "전화 영어"는 쥐약이었다.
영국에 가서 필수로 전화 대화를 해야 하는 경우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집을 구할 때, 한국인이 운영하는 집이 아닌, 에이전시나 집 구하는 홈페이지를 통해 현지인들에게 집을 알아본다면 꼭 통화가 필요하다. 또 영국에서 거주지 등록과 같은 효력이 있는 NI(National Insurance) 넘버 발급 시에 직접 전화를 걸어 담당자와 통화 후 우편물을 취득할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여기에 추가로 현지 리쿠르팅 에이전시들에 런던에 오자마자 이력서를 뿌린 덕에 전화기 음량을 최대한으로 올리고 있는 영어 없는 영어를 해야 했다.
나는 영어 연수 없이 대한민국에서의 평범한 영어교육을 받은 게 나의 영어의 전부이다. "영어 잘하세요?"라고 물어오면 "잘합니다."라는 대답보다 "비즈니스 회화 정도는 가능합니다."로 얼버무렸다. "잘"하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분명 나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 미드를 보더라도 자막 없이는 60-70%의 대화를 이해하면 훌륭했다며 스스로 내 귀를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 내게 상대방을 쳐다보지 않고 단지 귀로 들리는 내용에 대답을 하는 전화 영어는 삼분 남짓, 아니 일 분여의 통화에도 양 손바닥에 유전을 만들었다.
4.
약어 사용하기
전화가 잘 들리지 않거나 중요한 단어를 표시할 때 abbreviations를 사용하는데,
가령 Dog라는 단어를 말할 때, "D" for Delta, "O" for Oscar "G" for golf라고 한다. 시간이 금인 사람이나 혹은 늘어지는 통화를 썩 반기지 않는 사람은 "Delta Oscar Golf"이렇게 약자들로만 뱉어내기도 한다. NI넘버를 발급받으려고 우편물을 신청하는 전화를 할 때 첫 전화는 1분 통화하다 실패, 정신을 차리고 다시 통화해서 7분 정도 통화를 한 것 같다. 집 주소를 알려주는데 이 약자들을 가지고 얘기하면 빨랐을 걸 그때는 이걸 모르고 직원이 내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무한 반복을 해댔다.
5.
전화 매너
기본적인 영어 문법은 중학교 때 배웠지만 수십 년 지나서 중학교 때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랴.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전화로 온 몸을 뚜드려 맞은 경험이 있다.
육체적으로 맞은 게 아닌 정신적인 구타였다. 내가 근무하던 회사만 특이한 건지, 어찌나 우리 영국 친구들은 담배를 태우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이 근무 시간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지 틈만 나면 자리를 비웠다. 동료들의 자리에 전화벨이 울리면, 특히 우리 팀 자리에서 울리는 전화벨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지만 입사해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전화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벨소리가 마치 내 목에 밧줄을 걸어 잡아당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리테일러 담당자들의 전화를 받아 CS내용을 기재하고 고객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일종의 B2B CS를 담당하는 동료가 자리를 비우는 것은 정말이지 나도 함께 자리를 비우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였다. 그 자리는 전화를 몇 번 받지 않으면 본사로 항의 연락이 가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위에서부터 General manager, 사업부장, 차장, 과장, 그리고 나와 팀원들에게 또로로록 떨어져 우리가 처리를 해야 했기에 담당자가 자리를 비우면 팀원들이 대신 받아서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처리 내용은 주로 제품의 리턴과 관련한 제품의 상세 정보와 리턴 사유 등을 확인하여 기재하고 서비스 번호를 발급해 주는 일이었다.
입사 후에 이~삼 주는 주로 동료들이 전화를 받는 내용을 눈치로 듣고 "아 저렇게 말하면 되겠다." "그래, 저런걸 물어보면 되겠다." 싶어 고객과의 대화에 필요한 내용들을 메모해 두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동료들이 담배를 태우러 간 때에 또 한 번 CS 쪽에 전화벨이 울렸다. 삼 세 번이 울려도 아무도 전화를 받을 생각을 안 하기에 조용히 전화를 끌어다 받았다. "OO Company, may I help you?" 나쁘지 않았다. 격앙되지도, 그렇다고 심하게 가라앉지도 않은 정확히 교양 있고 적당히 느린 템포로 또박또박 말을 하는 40-50대의 아주머니 같았다. 나는 일전에 적어둔 리스트를 보며 "Can I ask?", "Can I,,…,?"로 대화를 꺼내어 필요한 정보들을 전산에 기재해갔다. 모든 기재가 끝나고 나서, "Thanks for calling, have a good day."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자 수화기 너머의 지극히 교양 있는 중년의 여성이 나를 저지했다.
"Can I say something?"
"......"
"Are you new?"
"...Yes, I am"
"I knew you are, cuz you were so rude."
수화기를 들고 있는 왼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찌릿찌릿해서 수화기를 들고 있는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 속에서 한다는 말이 "I'm sorry about that."뿐이었다. 어느 순간에 내가 너를 기분 나쁘게 했냐, 뭐가 내가 무례하다고 생각한 포인트냐 묻고 싶었지만 내 딸리는 영어로 이미 상대방이 나에게 충분히 빈정이 상한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 물어볼 수 없었다. 이미 커다란 물탱크의 물이 엎질러진 상황에 햇볕을 쬐며 담배와 커피를 즐긴 동료들이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미 내 얼굴은 청색인지 쑥 색인지 자색고구마인지 모르게 변해있어서 동료들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수화기 너머로 지적을 받은 나의 무례함은 세 가지였다.
하나, 질문을 할 때에 상대방을 높이는 태도인 Can you please가 아닌 "Can I" 를 계속 사용했다는 것.
둘, 중간 중간 "um~um~"을 했다는 것.
셋, 처음과 끝에 기본적인 일상대화나 인사 등을 하지 않았다는 것.
나는 서비스 전화를 받는 담당자가 아님을 얘기하며 무한 ‘쏘리’를 하고 나서야 통화가 끝났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팀원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울음을 참고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는 나의 영어나 태도를 지적할 거 같았던 동료들이 오히려 "가끔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많아." "너무 신경 쓰지마. 나도 예전에 어디서 온 이민자냐며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얘기도 들었어." 등의 위로를 해주었다. 나는 내가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드럽지 않다는 것을 내 스스로 나에게 벽을 만들었다. 영국사람이 영어로 지껄이면 모든 게 맞고 올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전화에 대한 두려움은 이 때 정말이지 수백 배가 되었다.
6.
두려움 극복하기
그 후로도 다른 부서 사람들과의 전화 통화, 끊이질 않는 동료 전화 받아주기로 인해 전화로 영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잦았다. 그 속에서 어쨌든 입에 풀칠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 나는 내가 잘하는 남 따라 하기 방법을 구사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동료들이 전화통화 하는 소리는 쉽게 들린다. 가끔 귀 기울여 대화하는 내용을 들으며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묻거나 농담을 주고 받는 내용이라든지, 업무와 관련된 내용에서의 어휘 사용이라든지 내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녹음을 하기도 했고 받아 적기도 했다. 그리고는 다른 통화나 대화에서 조금씩 써먹어 보기 시작했다. 영국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참으로 어이없지만 한편으로 놀라웠던 건, 정말 아무렇지 않게 are you ok? 등으로 대화를 시작하면 사람들이 기분이 좋다는 어조의 대답이 돌아오고 또 다른 안부의 대화가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먼저 다가가 긍정적이고 활발하게 사람들을 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차갑기도 하고, 적응이 덜 되었을 때는 두렵기도 했던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오늘 어때?" "오늘 바쁘지? 또 월요일이네" 등의 이야기를 하면 무거운 내용의 대화도 스물스물 넘어가는 경험을 했다.
처음에는 "이것들은 왜 저렇게 쓸데없는 잡담을 해대?"라고 동료들이 통화할 때면 속으로 비아냥댔었다. 이게 문화이고,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특히나 볼 수 없고 오로지 대화로만 소통을 이끌어가야 하는 전화 통화에서는 이게 예의이고 문화이고 생활임을 인지하고 이해하게 됐다. 그러고 나니 전화는 그냥 전화일 뿐. 모르겠으면 대놓고 "아,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데 나는 그 내용을 잘 몰라. 담당자 바꿔줄게."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내가 담당자가 아니니, 괜찮으면 연락처 남겨줘. 내 동료가 자리에 오면 바로 연락하라고 전달할게." 등의 멘트를 이어갔다.
7.
사투리
영어는 다 같은 언어라고 생각했던 나는 대학교 때 토익 시험을 치르며 영어도 인도, 필리핀, 호주, 미국, 영국 등 국가와 지역에 따라 차이점이 있음을 인지하게 됐다. 그리고 영국에서 나는 지역별 사투리에 따른 어마어마한 강세의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 런던에 와서 맨체스터 출신의 남성을 우연히 펍(Pub)에서 만난 적이 있다. 영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이어서 나는 그가 내가 영국에서 영어를 써나가는 데에 표본인 줄 알았다. 그리고는 영어를 하는 것을 포기할 뻔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언어의 강세는 거세진다. 명확한 발음의 QUEEN'S ENGLISH로 통하는 옥스포드 그리고 이게 영어인가 구별도 되지 않는 북유럽 언어인가 하는 스코틀랜드 악센트까지 지역별 발음도 쓰는 표현도 조금씩 상이하다. 이걸 또 전화로 듣다 보면. 외국인이, 그것도 영국에 반년도 채 살지 않은 외국인이 지역별 사투리와 강한 어조를 생선 가시 바르듯 발라가며 이해하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많을까? 나는 저능아인가? 라고 좌절할 필요 없다.
영국 현지인들끼리도 특히 동부, 남부 사람들이 북쪽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는 귀를 쫑긋한단다. 전화통화 할 때는 간혹 들리지 않는 표현도 있고, 그때는 대놓고 "미안한데 너 악센트가 너무 세. 조금 천천히 말해줄래? 나 사실 너 얘기 반도 못 알아 들었어. 하하하"라고 까지 말하며 상대방의 말을 잘못 알아 듣는 게 본인의 탓이 아닌, 상대방의 잘못임을 어필하는 정도의 영국인 동료의 과한 당당함을 보기도 했다. 되려 외국인인걸 눈치채고 내가 영어를 못알아 듣는다며 채근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어쨌든!
사투리 심한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도 알아듣기 힘들다는 거. 그러니 전화 영어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길 바란다. 영어를 하면서 항상 되새기는 한 가지가 있다. 나는 제2 언어로 영어를 하는 거다. 태어날 때부터 영어로 떠들어대는 세상에서 수 십 년을 보낸 사람들과 비교하면 당연히 내 영어가 턱없이 짧지만, 대화가 통한다는 거. 그들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몇 마디 하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는데 영어 단어 몇 천 개를 알고 떠들어 댈 수 있는 나는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결국 전화영어의 극복과 적응은 자신감과 연습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