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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Feb 12. 2018

(7)웰컴, 새로운 나의 도시

밀톤킨즈: 시골살이 

워킹홀리데이 제도를 이용해 영국에서 머물렀던 일년 반.

새로운공간에서 낯선 일들을 겪으며 천천히 스며드는 여행인 듯 삶인 일상의 기록을 담습니다.





1.

영국에 도착한지 한 달이 조금 지났다. 

호스텔에 머문 지 2주일 만에 런던 시내에 살 집을(엄밀히 말해 집이 아니라 방이다) 구했고 동시에 주에 세 번을 일하는 일을 구했다. 일이 없을 때에는 틈틈이 아이폰을 들고 런던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관광객처럼. 때로는취미 생활을 즐기는 동네의 그저 평범한 젊은이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런던을 활보했다.


런던브릿지를 거닐고, 작은 바람에도 “윙 윙”소리를 내며 무섭게 흔들리는 밀레니엄브릿지도 머리털 쭈뼛 세워가며 건너 다녔다. 테이트모던 갤러리에서 하루 반나절의 여유를 내 입으로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는 작품들과 함께 하기도 했다. 젊은이들이 득실대는 셰퍼드부시와 브릭레인, 쇼디치, 엔젤 등지를 서성이기도 했고 집 앞에 근사해 보이는 까페에 책 한 권 들고 앉아 커피 한잔에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분명 여유는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는 인간으로서 누리는 특권일 텐데, 왜 그리 한국에 있을 때는 갖질 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몸을 뉘일 공간이 있고, 일이 있고 또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불과 한 달도채 되지 않은 시기에 찾아온 안정감이다.




2. 

어느 한가로운 런던에서의 화요일 오전. 

나는 빵과 야채를 사기 위해 런던브릿지 아래 위치한 버로우마켓의 한복판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니 장을 보는 것은 핑계이고, 이곳에서 파는 길거리 음식에 맛들려 또 다른 메뉴를 탐닉하러 출동했다. 커다란 치즈를 불에 녹여 삶은 감자나 고기에 잔뜩 얹어 먹는 라끌렛, 스코틀랜드의 재발견이라는 다진 고기로 감싼 달걀 튀김인 스카치에그, 단단하나 텁텁하지 않은 고소한 스콘과 코코넛 얹은 미니 팬케이크. 군것질로 이것저것 맛보다 보면 배가 부르는 마성의 장소이다.

한참을 음식에 취해 있는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다. 

모르는 번호는 대체로 잘 받지 않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생각했다. 

그렇지. 

영국에서 내가 아는 번호가 어디 있겠나.


잊을 수 없는 치즈의 맛, 라끌렛 @버로우마켓, 런던


3.

인터뷰.

전화는 한국 기업의 영국 법인으로부터였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력서를 보냈던 기업 중에 한 곳이었다. 면접을볼 수 있냐, 위치는 런던이 아니지만 이곳은 영국이 주목하는 도시이자 성장세가 기대되는 곳이라나. 전화를 걸어 온 직원은 다짜고짜 도시에 대한 자랑을 수화기 너머로 풀어 놓았다.


런던 어디쯤이었다면, 분명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뷰를 봤겠지만. 나는 인터뷰 일정을 잡고는 과연 이 인터뷰를 내가 보러 가야 하는지에 대해 적잖이 고민했다. 런던 이외의 도시를 생각했던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영국에 대해 아는 부분이 많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고, 기왕에 영어를 배우고 익숙해지려면 방언보다는표준어나 여왕의 영어권에 머물고 싶었다. 게다가 여행이 아닌, 인터뷰를 위해 기차를 타야 했다. 산업도시이기에 인터뷰를 마치고 겸사겸사 둘러 볼 관광지조차 없다. 심지어 가는 길이 간단하지도 않았다. 기차를 타고 그곳에 도착하면 중앙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거나 택시를 타야했다. 인터뷰를 위해 움직이는 시간만 무려 왕복 네 시간이 넘었다. 면접 한 번 보겠다고 하루를 쏟아 부어야 했다.

 

면접 일이 오기까지 나는 수십 번 마음의 변덕을 부렸다. 그리고는 면접 당일.

전날 밤에 물을 뿌려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자켓을 걸쳤다. 집에서 5분 남짓 거리에 있는 유스턴(Euston)역에서 버진(Virgin) 티켓을 편도로 구입한 뒤 기차에 올라탔다. 런던에서출발하는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3주뒤, 나는 새로운 도시에서의 삶을 그리며 완전히 런던을 떠났다. 

굿바이 런던. 그리고 웰컴 새로운 나의 도시여.


밀톤 킨즈




4.

런던을 벗어나 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는 도시다. 

1967년부터영국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두고 계획하여 만들어낸 신도시 중에 한 곳이다. 옥스포드나 리버풀과 같은 도시들이 할머니라면 이곳은 신생아 수준이다. 런던과 버밍엄의 중간 정도 위치에 자리잡으며 두 도시에 밀집해 있던 인구들을 분산시키기에 충분했다.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최근 십 년간 영국 내에서 집 값이 가장 빠르게 오른 도시’
‘주행 중 사고로 인한 사망률이 영국 내 가장 낮은 도시’


출장이 됐건 여행이 됐건, 그리고 한번쯤 살아보려고 했건 간에 영국 땅에 발을 디딘 나의 다음 발걸음은 항상 “런던”이었다. 무언가 북적거리고 바쁘게 뛰어가는 도시의 삶을 지향하는 내게 이 도시의 첫인상은 초라했다. 취직 인터뷰를 보러 런던 유스턴역에서 버진 열차를 타고 40분 만에 도착한 중앙역에서부터 ‘나더러 이런 곳에 살라고? 나더러?’라는 의문만 계속해서 곱씹기 시작했다.


20분 남짓 그림같은 풍경을 보며 걷다 보면 사무실에 다다른다. 걸어서 출근하는 회사생활은 처음이다 @밀톤킨즈, 영국


탁 트인 중앙역 앞 광장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넓게 펼쳐진 도시가 한눈에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넓게 뻗은 도로 양 옆엔 런던에서 흔히 보이는 고층건물들이 보이질 않는다. 기껏해야 십층도 채 되지 않는 건물들이 높고 커다란 가로수들과 나란히 도로를 따라 여유롭게 길 안내를 하고 있다.

대도시의 위엄이란 찾아볼 수 없고 작년 여름까지 일년 가까이를 보낸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주쳤을 법한 수많은 패션테러리스트 집단을 이 곳으로 옮겨놓은 듯. 런던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옷차림의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런던에서 그 흔한 길거리 공연이나 전시, 뮤지컬도 없다. 

내가 좋아할만한 요소가 하나도 있지 않던 이 도시가 그런데.

언젠가부터. 

어느 순간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 순간은 언제인지 기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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