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조각
워킹홀리데이 제도를 이용해 영국에서 머물렀던 일년 반.
새로운 공간에서 낯선 일들을 겪으며 천천히 스며드는 여행인 듯 삶인 일상의 기록을 담습니다.
1.
갑자기, 독일
대학 동기인 썽호에게 오랜만에 메시지가 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볼 수 있냐고 했다.
결혼하고는 명절에 연말연시에 생일에도 연락 한번이 없던 동생(보통의 대한민국 남자사람친구 성향을 지님)이 뜬금없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나자고 하니 적잖이 당황해 전화를 걸었다.
갑작스럽게 잡힌 출장일정으로 그는 이미 독일이라고 했다.
영국에 있는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스무 날이 넘는 연차를 받게 됐는데 정작 언제 써야 할지를 고민하던 찰나에 순간적인 충동으로 이틀 휴가 신청을 냈다. 주말을 붙여 고작 나흘이라고 하더라도, 오후 4시 반에 퇴근을 하고 공항에 넘어가서 저녁 비행기를 타더라도 독일에서 친구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조건. 이런 게 나름의 시간적인 특권이었다.
아무리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의 거리일지라도, 불과 일주일 남짓을 남겨둔 채 찾아 보는 항공권이 저렴할 리 없다. 저가 항공사에 프로모션 티켓을 두 세달 전에 이용했다면 왕복 8만원도 채 되지 않는 가격으로 다녀올 수도 있었지만, 동기사랑 나라사랑을 운운하던 대학 동창의 요구에 왕복 300파운드(약 45만원) 가 넘는 항공권을 구입했다. 가서 재미 없기만 해봐라.
2.
관광객 놀이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일년 남짓이었어도 머무르는 자와 잠시 들르는 자의 마음은 분명 다르다. 내가 한국에서의 몇 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무작정 떠나왔던 그 도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라, 여행하느라, 나라는 존재를 고민하느라, 하고 싶은 일을 벌려보느라, 또 삶의 방향을 계획하느라. 쉴 새 없이 지나갔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시간이 쏜살같이 스쳤다. 이곳에 있던 그 시간에도 나는 이방인이었지만, 일년 만에 이 도시를 찾은 지금의 나 역시 이방인이다. 어느 공간, 어느 도시,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모두는 이방인일 테다.
공항을 나와 썽호를 기다렸다.
대학교에 입학할 당시 인기가 높은 TV프로그램의 사회를 맡고 있던 연예인 이창명과 닮은 외모로 <창명이>라 불리던 아이. 분명 1학년 때 까불거리던 친구가 몇 년 뒤에 학과 회장을 한다고 동기들을 놀래 켜더니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했고 또 예쁘고 참한 색시를 만나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사람은 변하는 게 맞다.
나는 독일에서 사용하던 USIM을 가져왔다. 선불카드를 구입해서 충전을 했지만, 웬일인지 사용이 되지 않는다. 공항의 무료 와이파이를 이용해 겨우 창명이와 연락이 닿았다. 회사에서 빌린 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으나 차를 어디에 정차시켜야 하는 줄을 몰라 여러 바퀴를 돌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차량에 부착된 독일 네비게이션에 대한 불만을 그 짧은 새 터뜨렸다. “여긴 독일이라고. 한국이 아니라고.”
우여곡절 끝에 창명이와 조우했다. 대학교 동창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남이라니.
반가움은 나중에 얘기하고 배부터 채워야지.
우린 차를 끌고 공항에서 이십 여분 정도 떨어진 프랑크푸르트 시내로 향했다. 점심도, 점심을 먹은 뒤 커피 한잔도 내가 자주 들렸던 곳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뚜벅이로 생활했던 경험 탓일까. 차를 주차장에 넣어두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 동안에 밀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자일 거리(Strasse Zeil)를 걷고 뢰머 광장을 지났다. 점심으로 슈니첼을, 괴테가 우유를 사러 아침마다 들렸다던 100년이 넘은 로스팅 카페 바커스(Wackers Kaffee)에서 커피 향 진한 카푸치노를 마셨다.
3.
관광객, 투어 그리고 독일 와인
와인 투어 가볼까?
관광객이 되니 투어라는 것도 하는구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사십 여 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하는 곳에 위치한 뢰델하임(Rüdesheim am Rhein)은 당도 높은 포도를 기를 수 없는 서늘한 기후에 독일에서 전체 소비되는 화이트와인을 생산하는 산지이다. 27도가 넘는 날씨에 내리쬐는 태양은. 구름이라도 없었으면 야외활동을 못했겠다 싶을 정도였는데 정작 구름 덕에 사진은 스산한 기운이 물들어 예쁘게 보이진 않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 우리가 들른 때는 뢰델하임의 와인 페스티벌이 진행 중이었고, 곳곳에서 잔잔한 행사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인구는 1만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 연간 방문객이 4백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하니, 서울 여의도를 생각하면 지금이 딱 일 년에 한 번 관광객이 몰리는 벚꽃축제 기간과도 같다.
한 사람당 10유로를 내면 와인 시음 잔을 제공받아 가이드와 함께 포도 농장들을 걸어 다니며 마을과 현지 생산 와인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Why not?
한 시간 반 가량 진행되는 투어. 독일어와 영어, 불어 버전의 가이드가 있었고 우린 온갖 외국인이 모이는 영어 가이드와 함께 했다. 석잔 정도의 와인을 마셨는데, 독일 와인은 역시 음.
4.
또 다시 안녕
프랑크푸르트 시내 한복판.
마인강을 따라 위치한 슈테델 미술관 옆에 있는 필름뮤지엄(FilmMuseum)에 들르는 일정을 마지막으로 일년 만에 찾은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시간이 바람처럼 스치듯 흘렀다. 줄곧 내가 좋아했던 식당과 펍, 그리고 카페에 들렀다. 오래간만이라, 재회의 뭉클함과 예전의 기억이 뒤섞여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떠나는 게 아쉬운지 주룩주룩 비를 흘리던 하늘에 대한 예의로 우산을 쓰지 않았다.
“누님, 그러다 대머리 된다.”
우산 쓴 창명이가 걱정스럽게 쳐다 보며 한 소리했다. 나와 창명이의 옆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우산을 쓴 건 창명이가 유일했다.
“촌스러워.”
한마디 뱉어낸 뒤 나는 공항으로 향하기 전까지 우산 없는 걸음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