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4, Paris, France
#아드리아나, 당신이 여기 살면
여기가 현실이 되는 거예요.
그럼 당신은
또 다른 세계를 동경하게 돼요.
진짜 황금시기를요.
현실은 그런 거예요.
항상 불만족스럽죠.
인생은 그런 거니까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 中
오페라 가르니에. 시간적인 이유로 이번 여행에서 어쩔 수 없이 제외했던 일정.
혼자 돌아다닌 덕에 한결 여유로워진 시간. 그 시간을 활용해 오페라 가르니에를 방문하기로 했다.
여행 일정이 담긴 엑셀을 닫고 구글 맵에 오페라 역을 검색한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파리의 지하철.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역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하는 관광객을 발견하곤 능숙하게 수동 문을 열어주며 마치 파리지앵인 양 어깨를 으쓱한다.
오페라 역 출구를 나오자마자 이 건물이다 싶었다. 파리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을 자랑한다는 명성에 맞게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외부가 인상적이다. 당연하게 내부에 대한 기대치도 상승한다.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금빛 조각과, 동상들. 그리고 천장화, 대리석 계단. 익숙한 느낌의 반복.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와서일까.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오페라 가르니에. 기대가 많았지만, 그저 나에게는 베르사유 궁전의 연장선상이자 아류작으로만 보였을 뿐이었다.
텁텁한 뒷맛이랄까. 베르사유에서 느꼈던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잔상이 되어 남아있던 탓도 있겠다. 가장 좋았던 것은 오로지 처음 출구를 나와 바라본 오페라 역의 분위기였다. 밖으로 나와 역 주변을 돌며 시간을 보냈다. 차라리 이것이 더욱 맘에 들었다.
조금이나마 이곳이 익숙해진 걸까. 두 가지의 익숙함. 가까워지는 익숙함과 멀어지는 익숙함. 불편과 설렘이라는 두 가지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한 익숙함. 나를 편안하게도 하고 무기력하게도 만드는 익숙함. 시작과 끝이 확연히 다른, 서로를 교차하는 이 익숙함.
익숙해지는 것은 어려웠고, 익숙해진다는 것은 지겨웠다. 익숙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하다가도 유습한 상태에 이르러 안일한 생활을 하다 보면 다시 또 정체에 대한 염증에 시달려야 했다. 익숙함을 부정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반복된 삶을 살아야 하는 보통 사람의 입장에선 꽤나 성가신 일이었다. 이것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오로지 새로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여행이었다.
새로움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여행.
그런데 이곳에서도 겨우 찰나의 반복에 염증을 느끼다니. 마침 오랜 유학생활을 했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거기도 처음에만 좋아. 나중엔 똑같더라고.”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친구의 말에 이제 와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대부분에게 있어 인생은 그런 것이었고,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나 보다. 현실의 익숙함과 밀고 당기기. 그러다 지치면 현실을 불평하고 투덜거리고, 다른 세계를 끝없이 동경하고. 그 생각이 들자 괜히 시큰해졌다. 나 역시도 남들과 똑같이 너무 많이 놓치고 사는 것 같아서.
익숙함에 대한 반감은 어떻게 보면 긍정적인 일이었다. 끝없이 벗어나고자 했던 욕구가 벌써 몇 번의 여행을 만들어 냈으니까. 또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까. 이것은 내 삶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어떤 성질이었다. 나를 앞으로 더욱 나아가게 하고, 끝없이 탐구하게 하는. 그리고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게 하는, 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동경과 갈망.
그런데 이는 그토록 익숙한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출근과 퇴근. 의미 없이 뒤적거리다 발견한 사진 몇 장. 술자리에서 나온 누군가의 경험담들. 반복된 일상에서 튀어나온 소소하게 특별한 이야기들. 나에게 동경은 회상을 기반으로 했으니까.
점차 새로운 여행지를 물색하는 시간보다, 다녀온 곳의 사진을 넘기며 추억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진다. 정체에 대한 염증은 혹시 향수가 아니었을까. 그때만큼의 행복함을 얻기 위한 발버둥. 환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은 잠시이지만, 그것을 기억할 시간은 평생이다.
당연한 삶. 되풀이되는 하루.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익숙한 이야기들.
어느 날 문득 슬며시 다가와
나를 웃음 짓게 하는 기억들.
그 이야기는 특별히 기억나는 것일 뿐, 이미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쓰일 삶을 헛된 투정에 허비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술 마신 다음날, 술자리에서의 즐거움은 잊고 현실의 숙취로 끙끙거림만 기억하는 이치랄까. 그 기억은 미래에서 꺼내 볼 지금 나의 익숙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게 내가 그리워할 것은 끊임없이 투덜거렸던 오늘의 익숙함이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의 나에게. 그리고 이곳을 기억할 미래의 나에게. 이 아름다움의 색이 생소해질 무렵, 하늘을 가린 흰색의 아파트에 염증을 느낄 즈음 난 다시 이곳을 그리워할 것이다. 오늘도 손쉽게 지나치는 익숙하리만큼 익숙한 지금을 말이다.
Season.1 - 안녕. 그리고 안녕
[Spain, France] by.mind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