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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moon May 08. 2017

1년이라는 시간
같은 곳, 다른 나

Day 1-1, Nagoya, Japan

어떻게 내가 잊어요 
우리가 만난 지 일 년 되는 날
바로 오늘을 
나도 얼마나 많이 
기다려왔는데요

유리상자 - 1년 되는 날 中



일 년이라는 시간을 다시금 정확하게 떠올리는 순간이 과연 년 중에 몇 번이나 있을까.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 카운트다운을 세며 느끼거나, 생일날 한 개가 늘어난 초를 바라보다 느끼거나, 나름의 특별한 기념일을 되새기거나. 그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 대부분의 나날들. 특히나 달력에 아무 표시도 없는 날에는 더욱이.


1년이라는 시간 속의 어떤 하루는 늘 그렇다. 1년이라는 시간을 억지로 구성하는 자투리의 순간들일뿐. 언제 그냥 다가오는, 슬며시 지나가고 잊히는.


그런데 나에게 최근 그 1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떠올리게끔 하는 날이 있었다.



2016년 4월 1일. 그 사람과 헤어지고 떠났던 오사카와 나고야. 문득 그때 생각이 나서 글을 썼던 '오사카 성 봄의 벚꽃을 추억하며' 그리고 글을 쓰다 즉흥적으로 구매한 항공권.


2017년 3월 31일. 단 하루가 차이나는 날, 똑같은 항공, 똑같은 나라, 똑같은 도시, 똑같은 숙소로 나는 떠났다.





목적지는 일본의 '나고야'.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홋카이도 등 사람들을 365일 내내 북적이게끔 하는 유명 관광지도 없고, 오키나와만큼의 자연경관을 보유한 휴양지도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느낌의 일본의 한 도시이다. 이곳을 굳이 다시 택한 이유는 나고의 특유의 잠잠함이 좋았다. 이는 내가 사는 동네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북적이지도 않고, 소란스럽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의 느낌을 간직해서였다.


당시 나는 뭔가 특별하게 하기 싫었던 것 같다. 따라서 유별나게 여행의 느낌을 내고 싶지도 않았고, 주변에 어디 간다며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이별'과 같은 이전만큼의 어떤 큰 이벤트라던지, 주요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일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몇 개월을 책을 만드느라 온 신경을 집중해서, 무념무상으로 그저 마구 겉돌고 싶었다는 핑계를 대야겠다.


물론, 아주 작은 기대는 있었다. 1년 전, 넋을 놓고 바라보았던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간직한 허름한 이자카야에서 기가 막히게 시원한 나마비루 한잔을 시켜놓고 멍한 상태로 뻐끔뻐끔 담배 몇 모금을 피고 싶었다. 하나 이 여행의 구체적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그 정도의 사소한 것들 뿐이었다.


그랬다. 이번 외출은 여느 때처럼 세상살이에 지쳐서 떠나는 여행이 아닌, 뭔가를 꼭 봐야 하는 여행이 아닌, 달력에 아무 표시도 없는 날처럼 큰 의미 없는 그런 것이었다.








'기대'의 느낌보다는 '회상'의 느낌. 연례행사처럼 몇 년째 일본을 오고 가다 보니, 이제는 설렘보다 반가움이 앞선다. 특히나 이곳은 1년 전과 똑같은 그곳.


이제는 익숙해진 일본의 복잡한 지하철. 눈높이에 닿는 동그란 손잡이. 사진만으로는 전혀 의도를 알 수 없는 다닥다닥한 광고들. 그것을 차분히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 우리의 숙소는 오스칸논 역에 위치한 한 맨션.



오랫동안 닿지 않았던 특정한 장소에 간다는 것. 이는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을 몰고 온다. 기억이라는 핑계로 지도를 접어두고 오로지 감으로만 발걸음을 뗀다. 여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리송한 기억의 파편들을 고집스레 꿰매 한 폭의 주관적인 지도 한 장을 완성한다. 그렇게 난 그 지도대로 오만하게 동행인들을 이끌었다.


다행히 그 집의 비밀번호는 기억을 못 할지라도, 발걸음만큼은 정확하게 향하고 있었다. 2번 출구로 나와 좌회전을 하면 보이는 도깨비 건물과 오스칸논 시장 입구.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걷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노란빛을 간직한 높이 솟은 맨션. 같은 풍경, 같은 자리를 그대로 기억해낸 내가 대견하기도 하고, 1년 만의 재회가 내심 반가워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때'의 '그곳'에 간다는 것.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때였나. 지금은 어렴풋이 기억나는 유년시절의 그 아파트에 다시 갔던 기억. 71동 1층에 있던 우리 집은 허물어져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금이 가고 색이 바랜 유년 시절의 그 5층짜리 맨션의 모습은 삐까번쩍한 고층의 아파트가 되어 있었고, 방과 후 공을 차던, 잡초가 무성한 그 화단들에는 단정히 깎인 나무들이 어린아이들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벤치에 앉아도 되나 싶었다. '진화'가 된 그 공간은 나에게 '소멸'로 다가왔다. 재건축으로 허물어진 것은 비단 아파트만이 아니었다. 내 기억들의 어디부터 어디까지의 일부분이 엎어지는 느낌. 내 보금자리였던 곳이 사그라져, 재가 되어 날아가는 느낌. 눈이 핑 도는 그 알싸한 감정이 싫어서 그 후로 나는 그곳을 다신 찾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은 그때와는 정반대의 기분이었다는 것이다. 십 년여를 보냈던 그곳에서의 회상보다 1년 전 단지 며칠의 기억을 갖고 있는 지금이 더욱 반가웠던 것은 좀 묘했다. 상실감을 다시 채워낸 포만감 때문이었을까. 내 생각 속의 그 모습과 정취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일까. 새록새록 떠오른 기억이 정확히 들어맞아서일까.


무언가가 그때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어준다는 것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욱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괜한 이기심이자 미련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처럼 우리는 계속 그런 것들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카에 역



예전 홍콩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가운데가 뻥 뚫린 복도식 맨션. 입구를 굳게 지키고 있는 자물쇠 뭉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느껴지는 특유의 향. 낮은 천장과, 아담한 식탁. 누우면 소리가 나는 침대까지. 기억 한켠을 자리 잡고 있던 그 추억의 장소에서 1년 전과 똑같은 방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점찍어둔 이자카야인 '대장 수산'으로 향했다.


일 년여 만에 걷는 사카에 역의 거리. 화려한 네온사인, 천천히 제자리를 돌고 있는 대관람차. 금요일 밤 거나하게 술이 오른 새빨간 얼굴의 넥타이 부대들, 긴 머리의 호객꾼들. 마치 1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온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대장수산



그 고즈넉한 이자카야에서 예정대로 나마비루 한잔을 시켜놓고 담배 한대를 물었다. 4개의 잔이 모여 만들어지는 청명한 소리. 잔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건배. 그리고 안도의 한숨처럼 뻗어 나오는 연기. 매캐한 혀를 정화하는 맥주의 탄산. 이 예정된 단순함이 좋았다. '고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소한 여행의 이유가 '필연'으로 큼지막히 번졌다.





회 한 접시와 안주 몇 개, 사케 한 병을 주문했다. 비 내리는 밤의 황량함과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그곳에서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고 많은 생각을 했다. 1년 전 이맘쯤 떠들어댔던 지키지 못한 다짐들이 떠올랐고, 1년 전 동행했던 그 사람들을 추억하기도 했다. 철없는 생각은 그때와 다름없었지만, 분명 나는 많이 변해 있었다. 이직이라는 똑같은 다짐을 올해도 안고 살아가지만 삶의 방향은 조금 틀어져 있었고, 삶의 고민들은 더욱이 늘어나 있었다. 그렇다고 1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느 정도 먹고 밖으로 나와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를 걸었다. 약간의 비가 섞은 차가운 바람을 등지고 걸었다. 들이킨 술로 상기된 몸뚱이에 들이친 서늘한 기운이 좋았다. 이어폰에서는 정준일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라이브 앨범의 '안아줘'를 듣던 나는 3집의 '푸른끝'을 듣고 있었다. 행복했다. 1년 전 여행에 설레 잠못이루던 그날처럼 말이다.





숙소로 돌아와 맥주 한잔을 하며 다시금 1년 전의 나를 되새겼다.


그때와 다른 나는,

1년이라는 시간 뒤에

그때와 똑같은 도시에 있었다.




Season.2  -  산책

 [Japan]         by.mind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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