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통금은 9시입니다.
"너 어디냐?"
등골이 오싹해지는 밤 12시..
그때 들려오는 전화벨소리..
그건 바로 아빠다.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밖에 돌아다니냐?
빨리 집에 와!
"아빠 오늘 남자친구랑 2주년인데.."
“됐고, 빨리 집에 와라. “
20대 초반, 중반을 지나 후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통금과 외박에 제약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바로 여기 있다. 12시의 신데렐라다.
20대 초반엔 9시가 넘어가면 아빠에게 전화가 오고,
20살 중반까지도 11시 안에
꼬박꼬박 집에 들어가야 했다.
19살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밤 9시가 넘어가면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저.. 부모님이 걱정하셔서
집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회사 직원들은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거나
‘너만 회식 자리를 빠지냐?’는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 뒤로는 회사 직원들이 나를 빼고
회식에 갈 때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 늦게 들어가면 크게 혼나는 게 더 싫었다.
어차피 술, 담배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 흔하다는 클럽도 감성주점도
20대 후반이 되도록 가본 적도 없다.
사고 한 번 친 적 없는 착한 딸,
그게 지금의 나다.
아빠가 딸을 정말 걱정하는 건
세상이 워낙 흉흉하니 그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웬만하면 걱정 안 끼치게 집에 있었다.
가끔 어쩌다 한 번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서 분위기가 무르익어
집에 가기 너무 아쉬웠다.
손이 발이 되도록 간절하게 허락을 맡아
새벽 1시까지 놀 수 있었다.
하지만 통금과 외박에 제약이 있다고 해서
연애까지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냐?
20살 초반에 고등학교 절친의 소개로
같이 게임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냈고
8살 연상의 착하고 다정한 남자를 만났다.
자연스럽게 취미가 같아 사귀게 되었다.
기쁜 마음에 축하받고 싶어
아빠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이야기를 했다.
충격적 이게도 내 눈앞에서
컴퓨터 본체를 부수고 모니터까지 던져버렸다.
아빠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당장 헤어지라고 통보를 받았다.
힘이 쭉 빠지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장 헤어지겠다고 했다.
그리고 2가지의 결심을 내렸다.
헤어지게 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거다.
아빠에게 남자친구가 있다고 평생 얘기 안 한다.
그 뒤로 주말에 어디 나갔다 오면
항상 어디 갔다 왔는지 물으셨다.
"어디 갔다 와?"
"누구랑 놀았어?"
"오늘 뭐 했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신 걸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그 말의 의도는
"너 연애하고 돌아다니는 거 아니지?"로 들렸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친구들이랑 여행 갔다 오겠다고 해도
매일 인증 사진 찍어서 아빠에게 보내야 했다.
그런 통제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새하얀 거짓말" 밖에 없었다.
남자친구랑 데이트하고 왔어도
속 편히 이야기하지 못했다.
기념일 때 받았던 꽃다발도
"나를 위해 샀어"라고 말하며
그렇게 4년을 사귀었다.
서울과 부산 장거리 연애였으니
더 애틋하기도 했다.
그 당시엔 정말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었지만
결국 여러 가지 상황을 감당하지 못했고
서로 시간을 갖자고 했다.
그래도 마지막에
서로가 더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별했다.
4년 동안 나의 연인이었던 사람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줬다.
인내심
침착함
성실함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하기.
항상 힘이 되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매일 행복한 건 아니지만
행복한 순간은 매일 있어"
"그거 곰돌이 푸가 말했던 거지?
맞아, 나는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늘 그래왔듯이 잘 이겨낼 거야.
"지금 넌 엄청 캄캄한 밤이지만 내일 아침에 해가 뜨는 걸 행복하게 바라볼 수 있을 거야. "
아마 아빠가 헤어지라고 했을 때 헤어졌다면,
이런 다정함에 대해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답답함에 못 이겨서
삐뚤어지고 엇나가지 않았을까?
지금도 내가 한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아빠를 오랜 기간 동안 속인 것에 대한
미안함은 있지만,
평생 나의 선택을
아빠가 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나의 삶은 오롯이 내가 책임지고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나답게 살 수 있다.
나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선택들이 하나씩 모여서
내면이 단단해지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선택들을 쌓아가고
다음 인연을 만났을 때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 다짐을 깼다.
아빠에게 당당하게 용기 내어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했다.
대신 집에서는 절대 하지 않는다.
무조건 새로운 장소
그리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식당에서
다 같이 삼겹살 구워 먹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했다.
왜냐하면 집이라는 공간은
아픔이 묻어나있는 곳이다.
상처가 많아
아물지 않은 공간에선
이성적인 판단이 어렵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야기하면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대화할 수 있게 된다.
아빠는 여전히 2년 동안 만난
남자친구의 존재를 부정하고 계신다.
마음에 안 드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삼겹살 고기도 한쪽 면이 다 익어야
반대면으로 뒤집지 않나?
아빠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해서
남자친구가 나를 어떻게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얼마 전엔 남자친구가 선물해 준
우리의 사진이 찍힌 액자를
거실 장식장 중앙에
잘 보이도록 놔두었다.
이렇게 20대 후반이 되어도
통금과 외박에 제약이 있지만,
머지않아 이런 선택들이 쌓여
독립에 확신을 가져올 것이다.
독립은
정서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둘 다 이뤄야 한다.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고,
어려운 일이 다가와도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용기를 가지고
당신만의 선택을 쌓아나가서
당신만의 속도로 독립을 하길 바란다.
독립을 하는 것에 늦은 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