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나의 전부였고, 나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다.
어릴 땐 엄마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까 두려웠다.
엄마를 항상 기쁘게 해줘야 했고,
인정받아야 엄마를 내 곁에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정서적으로 자유로워졌다.
어떻게 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성적이고 조용했던 중학생 시절,
빼빼 마르고 네모난 사각 뿔테안경을 꼈었는데,
항상 어두운 표정이고 웃음기가 없었다.
반면에 3살 차이의 오빠는 소위 말하는 인싸였다.
항상 주변에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고 공부도 잘해서 장학금까지 타올 정도였다. 엄마는 어딜 가든 아들 자랑으로 입 아프게 칭찬하기 바빴다.
비교하지 않으려고 해도 엄마가 오빠한테만 소시지 반찬을 더 많이 주거나 용돈을 더 많이 챙겨주는 걸 보면서 질투와 열등감을 느꼈었다.
그래도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공감"이었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은 두 분 다 새벽 늦게 들어오셨자만 어쩌다가 엄마가 일찍 퇴근하시는 날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해주셨다.
어느 날은 피곤하셨는지 계란말이에 소금이 왕창 들어가 있었다. 아빠랑 오빠는 "이게 뭐냐, 너무 짜다."라며 손도 안 댔는데, 엄마의 표정에서 씁쓸함과 동시에 서운함이 보였다.
엄마가 슬프면 나도 슬플 것 같아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맛있기만 한데? 뭘. 밥이랑 먹으면 괜찮아!" 하면서 바다애서 온 계란말이를 한입에 넣고 밥 세 숟가락을 욱여넣으면서 먹곤 했다.
그렇게 엄마가 "아이고, 잘 먹네"라며
환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유일하게 엄마가 내게 칭찬해 주고 인정해 줬던 것이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는 거였다.
오빠가 오이소박이나 각종 고사리나물, 시금치를 먹지 않을 때마다 나도 속으로는 굉장히 먹기 싫었지만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억지로 꾸역꾸역 먹었다.
(지금은 오히려 건강에 좋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자주 했던 말을 되짚어보면,
"네 오빠 반만큼이라도 되어봐라"
"오빠는 알아서 다 하는데 너는 이것도 못하니?"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너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못생겼어?"
엄마는 나의 전부였기에
"내가 문제가 많아서 엄마가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외모도 더 예쁘게 꾸미려고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똑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랍정리를 하다가 자물쇠로 걸려있는 일기장을 발견하게 됐다. 내 기억 속에 없던 일기장이라 호기심에 일기장을 열어본 순간 얼어붙어서 그 자리에서 일기장을 읽고 전부 찢어버렸다.
그 일기장의 처음에는 빨간색 글씨로 나를 향한 혐오의 말들이 가득 적혀있었다.
"나는 내가 너무 싫다. 엄마의 마음에 들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
"당장 차에 치여서 병원에 입원해버리고 싶다. 그럼 엄마가 나를 바라봐 주지 않을까?"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데 괜히 태어나서 엄마를 힘들게 한다. 차라리 죽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나에 대한 혐오가 더욱 심해졌다.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된다.
해소되지 않은 분노라는 감정의 씨앗들이 자라서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변화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당신이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다.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그저 "행복해질 용기"가 필요하다.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그때 읽게 된 책이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었다.
아들러의 심리학에 대해서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 형식으로 이어진다.
철학자는 청년에게 사람은 현재의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목적론"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에 놓인 문제를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 책에서 나의 세계를 바꿔놓은 내용을
3가지로 정리해 봤다.
감정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였다.
철학자: 분노는 한순간의 감정이야. 어느 날 엄마와 딸이 큰소리로 말다툼을 벌였네. 그런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면서 "여보세요?" 하고 엄마는 전화를 받는데 여전히 분노의 감정이 남아있었어. 그런데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딸의 담임선생이었고 그걸 안 순간 엄마의 목소리는 정중한 톤으로 바뀌었지. 그대로 격식을 차린 채 5분 동안 통화하고 전화를 끊자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딸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분노란 언제든 넣었다 뺄 수 있는 도구야. 엄마는 화를 참지 못해서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야. 그저 큰소리로 딸을 위압하기 위해, 그렇게 해서 자기의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한 거야.
이 문장에서 엄마가 나를 계속해서 오빠와 비교했던 이유는, 아들이 중심이 되는 환경에서 자란 엄마가 그 생각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즉, 남아선호사상(아들을 낳는 것을 선호하는 문화)이 강한 시대였다.
그리고 잘 키워서 누가 봐도 자랑스러운 아들을 세상 밖으로 알렸을 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는 것 같아 뿌듯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인 기준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철학자: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라는 말이 있네.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걸세.
경쟁 끝에는 승자와 패자만 남게 되어 결국 열등감으로 늘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고 세계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사람들은 늘 자네를 무시하고, 비웃고, 틈만 나면 공격하고 곤경에 빠뜨리려는 방심할 수 없는 적이고, 무서운 장소라고 여기게 될 거야.
하지만 시선을 바꿔서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고 느낄 수 있다면 세계를 안전하고 쾌적한 장소로 보이게 될 걸세. 불필요한 시기심이나 의심에 눈이 멀지도 않고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도 줄어들 걸세.
만약 내가 비교당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나도 아들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미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과거에 일어난 일에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빠는 부모님이 맞벌이로 바쁘실 때 굶지 않도록 밥을 챙겨줬고, 혹시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 당하고 있진 않은지 걱정해 줬고, 엄마가 나에게 서슬 퍼런 말을 던지면 나서서 내 편을 들어주었다.
더 이상 오빠와 나를 비교하는 삶을 멈추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자 분위기와 전하는 말이 달라지며 서로 장난칠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다.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한 인정욕구 포기하기
철학자: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야.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줄까?
타인의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정말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타인과 나의 인생의 과제를 분리할 줄 알아야 하네.
상대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건 상대의 과제이지 내 과제가 아니야.
독선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과제를 분리하는 걸세.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건 내 과제이고 "나를 싫어하느냐 마느냐"라는 타인의 과제일세.
엄마가 오빠를 통해 자신의 자존감을 채울 수 있는 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엄마의 과제다.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해도 엄마의 마음에 들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엄마의 마음에 들으려고 했던 것도 내가 엄마의 과제에 지나치게 몰입했던 것이다.
엄마와 나의 인생의 과제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정받으려고 했던 것을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나만의 인생의 과제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먼 길을 돌고 돌았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지금 현재, 여기를 살아가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적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말고.
알프레드 아들러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통해 나를 채워 넣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뀌면 나의 세계가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