릿터 13호 (2018년 8.9월호)
여성-서사를 다시 보자. 마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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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었고 밤바람이 차갑다. 며칠 전 잠들기 전에 릿터를 다시 구입했다. 날이 쌀쌀해지면 도서관에 빽빽이 꽂힌 시집 사이에 쪼그려 앉아 책을 읽던 기억이 떠올라 문학을 찾게 된다. 쌀쌀한 바람 탓에 릿터도 함께 떠올랐다. 어떤 주제의 문학들이 이번 가을을 채워줄까. 들뜬 마음으로 잠자리를 정리하고 누워, 편집자의 말부터 읽기 시작했다.
어떤 책은 읽고 나면 한없이 말을 아끼게 되는 반면, 어떤 책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이 터질 것 같다. 이번 릿터 13호는 후자였다. '여성-서사' 주제 아래 쓰인 글들을 읽고, 잠도 들지 못한 채 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점차 채워갔다. 언젠가부터 내게 떠오른 생각들이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었다니. 이번에도 릿터는 나의 고민을 이 시대 사람들의 고민으로 확장해주었다.
어릴 적부터 읽어왔던 많은 책들은 남성들의 서사였다. 나도 릿터 속 구절처럼 책을 읽을 때 남성을 '남성'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으로 받아들여, 그가 겪게 되는 경험들을 함께 하고 즐거워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었고,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이상의 <날개>도 읽었다. 세상이 좋다고 말해주었던 수많은 -남성 작가들의- 책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경험으로 내 폭을 넓혀왔다. 내게 작가 혹은 주인공의 성별은 선택의 기준이 아니었다.
그러다 주인공이 여성이거나 여성 작가들의 책들이 시선을 끌었다. 셰릴 스트레이트의 <와일드>가 시작이었을까,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도 재미있었고 원래 좋아하던 박완서의 글을 전집으로 소화시키기도 했다.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도 어찌나 재미있는지.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코니 윌리스는? 작가의 다른 책도 이 잡듯 뒤져 읽었다. 수많은 여성 작가의 작품들 역시 모두 다 좋은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풀어낸 수많은 이야기들이 뒷줄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재미를 넘어 의식적으로 여성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부러 여성 작가 혹은 여성들의 삶에 집중하는 책을 골라 읽었다. 여성의 성취가 가려지거나 흐려진 건 문학뿐 아니라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롭게 주목해야 하는 이야기와 다시 보아야 하는 이야기도 끊임없었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에서도 페미니즘이 주요한 화두가 되며 주목받는 책이 더욱 많아졌다. 그러한 책들을 비롯해, 내가 올해 읽은 책 중 대다수는 주인공이 여성이거나, 여성 작가들의 책이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을 찾아 읽었고, 책들은 남성 작가의 작품들과 같이 -혹은 그보다 더- 내 폭을 넓혀주었다. 나는 이제 성별이 중요해졌다. 뒷줄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드러내고, 마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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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는 다루지 않았으나 책에 실린 조남주 작가의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