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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잉크 Jul 04. 2021

42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서울극장을 추억하며

내 에피소드는 사라지지 않도록 기록하기

추억 속 서울극장


종로3가 서울극장 앞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앳된 남자A가 우두커니 섰다. 짧은 스포츠 머리를 했지만 군인 보다는 고등학생에 가깝다. 손목시계를 몇 번이고 들여다 보는 청년 머리 위로 <편지>라는 영화 입간판이 올려다 보인다. 당시 故최진실, 박신양 배우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됐는데, 극장 입구부터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을 보니 영화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안녕~ 오래 기다렸니?"

"어, 아니야. 나도 조금 전에 왔어"

또래 여자B의 갑작스런 등장에 당황하지 않고 남자A가 답했다.


"나 사실 늦은거 아니다. 아까부터 와 있었어. 혹시 너가 오지 않으면 창피할까봐 저 뒤에서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어"

여자B의 말투가 얄밉지 않았다. 오히려 쑥스럽게 꺼내놓는 진심에 남자A는 어떻게 맞장구 쳐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어색한 두 번째 만남, 여전히 여자B가 리드했다.

"너의 취향 물어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영화 정해서 미안. 그치만 나 이영화 꼭 보고 싶었거든"

"그래, 난 괜찮아. 영화는 다 좋아하는 편이라..."


여자B와 함께 깜깜한 영화관에 들어간 남자A는 갈등했다. 학원에서 처음 보고 마음에 들어 학원샘을 졸라 전화번호를 얻어내곤 전화를 했다는 여자B를 평소 같으면 단호하게 잘랐을텐데 그러지 못했다. 부담줄까 수능까지 꾹꾹 참고 기다렸다는 말에, 서툴지만 진심으로 용기낸 그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한데 하필 슬픈 영화라니... 하염없이 눈물을 쏟게하는 최루성 멜로영화였던 탓에 조명이 켜지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도록 여자B는 눈물을 연신 닦았다.

"에고 이렇게까지 슬픈 영화인줄은 몰랐네. 미안 너무 울었다"

천상여자의 약한 모습을 보니 남자A는 준비했던 말들을 꺼내지 못했다. 그냥 영화 잘봤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끝으로 헤어졌다. 


서울극장. https://www.seoulcinema.com(사진출처)


1997년, 내 기억 속 서울극장과 함께하는 에피소드이다. 함께 영화 본 이후 다시 만남은 없었다. 서로 입학하는 대학의 지역이 달라서 자연스럽게 끝났지만 사실은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좁혀지지 않는 간격에 그 아이는 더이상 용기를 낼 수 없었을테다. 나 역시 좋아하지 않는 만남을 지속하는 것이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정도는 그 나이에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기사> 42년 역사 서울극장 오는 8월 폐점

어제 뉴스에서 서울극장이 폐점하기로 확정됐다는 소식을 들으니 참 만감이 교차했다. 98년 강변에 GCV라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생기기 전까지 영화1번지는 종로였다. 대한극장을 위시한 충무로도 있었지만 단성사와 피카디리, 그리고 서울극장이 몰려있는 종로3가야말로 8-90년대 멀티플렉스였다. 


오래전 단성사가 폐업했단 소식도 놀라웠지만 CGV에 운영권을 넘긴 피카디리에 이어 서울극장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니 사춘기 시절 함께했던 내 추억들마저 사라지는마냥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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