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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Oct 03. 2023

친동생만 할 수 있는 축사

#미국결혼식 #리허설디너

1. 친동생만 할 수 있는 축사


오빠 결혼식 한 달 전쯤이었나. 오빠가 리허설 디너(rehearsal dinner) 때 축사를 해달라고 말했다. 미국 사람들은 축사를 어떤 식으로 하는지, 도대체 리허설 디너라는 게 뭔지, 그 분위기가 어떨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꼼꼼하게 찾아보고 계속 신경 쓰기 난 너무 바빴다. 미국 갈 준비만으로도 바쁜데 가기 전 날까지 이 일, 저 일 계속 터지는 바람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축사가 정말 술술 써졌다. 신기하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직접 써볼 시간이 없어서 일을 하는 와중에(분석 샘플들을 사포에 열심히 갈면서) 축사 때 어떤 말을 할지 머릿속으로 먼저 그려보았는데, 하고 싶은 말들이 내 몸 구석구석에 숨어있다가 알아서 퐁퐁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축사를 다 썼다.

축사에는 오빠의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그렸다.

"어렸을 때 오빠의 식탐은 엄청났어요. 엄마가 과자나 초콜릿을 사 오면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웠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는 울면서, "내 치토스 어디 갔어?!"라고 물었죠. 엄마는 과자를 서랍이나 선반, 옷장에 숨기기 시작했지만, 오빠는 무슨 초능력이라도 가진 사람처럼 그 다 찾아냈어요. 지금의 오빠가 이렇게 씩씩하고 건강한 이유는 다 그 과자들 덕분일 거예요."

"학창 시절에 오빠는 매일 크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녔어요. 그 가방 속에는 항상 두껍고, 어려워 보이는 책들이 들어있었죠. 읽을 시간이 없어도 오빠는 무조건 책을 챙겨나갔어요. 만약 그 책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오빠의 키가 지금보다 몇 인치는 더 컸을 거예요. 제가 장담해요."

그리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새언니를 만나게 되다니 오빠 너 진짜 성공했다!"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이번에 실물로 처음 본 새언니는 정말 천사 같았다). 새언니에게, 오빠가 앞으로 언니에게 분명 든든한 존재가 되어줄 거라는 말도 했다. "비록 우리 가족에게는 딱히 든든한 존재가 되지 못했지만..."이라는 농담도 덧붙였다.


축사 중간중간에 농담을 참 많이 넣었다. 거의 한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농담 한 문장씩 끼워둔 것 같다.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웃음 속에 따뜻함이 담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준비할 때는 농담의 비율이 나름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축사 시간이 다가오자 걱정이 밀려왔다. '웃자고 말한 부분에서 사람들이 안 웃으면 어쩌지? 나의 어색한 영어 발음과 비루한 유머 감각으로 분위기가 요상해지기라도 하면 어쩐다...'

다행히 하객분들은 내가 의도한 부분마다 큰 소리로 웃어주셨고, 덕분에 무사히 축사를 마칠 수 있었다.

축사를 할 때 정신없이 대본을 읽으면서도 일부러 틈나는 대로 오빠와 눈을 마주쳤다. 오빠는 미소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빛으로 마음을 주고받던 그 찰나가, 아직도 마음에 깊게 남아있다.


결혼식 전날 열 '리허설 디너'.





2. 미쿡 솨람 다 된 오라버니


오빠의 미국 친구 중 한 명이 내 다음 순서에 축사를 했는데, 영어 리스닝을 못하는 나의 귀에도 오빠에 대한 칭찬만큼은 쏙쏙 들어왔다. 물론 축사니까 당연히 좋은 말들을 쓰겠지만, 그래도 외국인의 입에서 나온 오빠 칭찬에 괜히 흐뭇해지면서 어깨가 올라가고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오빠와 나는 미국과 한국에 떨어져 산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다른 형제들과는 느낌이 좀 다르다. 같은 문화권에서 한 가족으로 살다 보면 형제가 변해가는 모습을 비교적 실시간으로 보게 된다. 하지만 나의 경우 몇 년에 한 번 꼴로 오빠를 만나다 보니 그 변화가 무척 크게 다가오는데, 특히 오빠를 미국 현지에서 만날 때면 그 충격이 더 크다. 오빠를 미국 땅에서 만난 건 이번이 어언 7년 만이었는데, 완전히 미국놈(?)이 다 되어있는 오빠를 보며 다시 한번 놀랐다. 사실 오빠 인생의 40프로를 미국에서 보냈으니 당연한 일인데도, 난 여전히 오빠의 미국식 애티튜드가 신기하다.

오빠는 20대 초반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혼자 떠났다. 이방인으로서 그곳에 자리 잡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겪은 위기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끝끝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빠가 꿈과 야망을 손에 꼭 쥐고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오빠에게는 특유의 긍정 에너지가 있다(부럽다). 자신의 장점을 살려서 미국 사회 속에 젖어 들어 어엿하게 잘 지내고 있는 오빠를 보니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리허설 디너에서. 신부와 신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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