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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Mar 21. 2024

엄마만의 방식으로 이겨낸 시간

오랜 시간 엄마는 전업주부였다. 매일 청소를 해서 방바닥은 반짝거렸고 밥상은 엄마의 요리로 늘 다채로웠으며 집안 구석구석에는 엄마의 취향이 담긴 살림살이들이 오손도손 자리하고 있었다. 집안일을 하고 남는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는 게 엄마의 일상이고 즐거움이었다. 집이라는 안전하고도 아늑한 공간을 엄마는 애정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엄마는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여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다. 천 원도 편히 쓰지 못할 정도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시절이었다. 살림에 보태기 위해 아빠의 부동산으로 일을 나가기 시작한 엄마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3층짜리 작은 상가 1층에 다섯 개의 부동산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여리고 내향적이었던 엄마는 그 틈새에 끼인 채 혹독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진심으로 대했던 손님을 다른 부동산에 빼앗길 때면 엄마는 화를 내기보다 마음 아파했다. 자신이 담당해서 팔아준 단골손님의 집값이 그 후에 오르면 엄마는 죄송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손님이 머물렀다가 금방 떠나고 바로 또 다음 손님이 들어오는 일이었다면 지난 일을 곱씹을 여유가 없었겠지만, 부동산은 줄곧 파리가 날리다가 한 번씩 큼직한 일이 진행되는 식이었다. 고요한 사무실 책상에 앉아 엄마는 그런 상처나 배신감, 미안한 감정 등을 계속해서 되새겼다.


 "엄마, 손님한테 마음 주면 엄마만 힘들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감정을 쏟으면 이 일을 어떻게 해."


 얼굴이 가뜩 상한 채로 오늘 받은 상처를 늘어놓는 엄마에게 몇 번이고 말했지만, 엄마의 대답은 늘 "그러게 말이야."였다. 씁쓸하게 웃으며 엄마는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아무 의미 없는 건데. 그치? 그러게 말이야. 잊어버려야지 하는데도 마음이 뜻대로 잘 안되네. 그러게 말이야, 하면서.


 엄마가 일하던 10년 동안 늘 엄마를 걱정했다. 나야말로 사람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쏟고 그에 대한 대가로 줄곧 상처를 떠안는 애송이었지만, 그래도 엄마보다는 나의 경우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람한테 상처를 받으면 저 사람에게 가서 위로받았고, 여기저기 나가 놀면서 그 상처를 잊기 위해 노력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상처를 받고 나면 마땅히 풀 곳이 없었고, 매일 식구들을 챙겨야 하니 혼자 있을 시간도 없었다. 아빠는 엄마가 너무 착하고 순진해서 큰일이라고, 사람들의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어버린다고 했다. 이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 억세거나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어야 하는데 엄마에게 그런 재주는 없었다.


 엄마는 그 시간을 어떻게 버틴 걸까. 온종일 시달리다가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엄마는 밥값을 아껴야 한다며 점심 도시락으로 챙겨 갈 음식을 했고, 청소나 설거지를 꼬박꼬박 하셨다. 그런 일상을 보내며 엄마는 종종 두통을 호소했다. 어디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병원에도 가보고 검사도 받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원인은 찾지 못했다. 두통에 이어 엄마는 건망증이 갈수록 너무 심해진다며, 이러다가 혹 치매라도 올까 봐 두렵다고 이야기하시곤 했다.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그 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무서워서 괜히 퉁명스럽게 받아치곤 했다. "에이. 엄마, 그 정도 건망증은 저도 있어요." 하고. 그 시절의 나는 방에 처박혀서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집안의 사정들이 나에게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으로 꾹 막아두었던 것 같다. 나 살기 버겁다고 외면했던 시간들이 엄마에게 너무 외롭진 않았을까. 그런 죄송한 마음이 한켠에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우연히 엄마의 오래된 수첩을 읽게 된 나는 그제야 오래도록 케케묵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엄마가 사무실에서 일하실 당시 틈틈이 쓰셨던 수첩이었다. 심해진 건망증이 걱정되었던 엄마는 뇌 운동 삼아 '연상 노트'를 쓰셨던 모양이다. 페이지의 가장 윗 칸에는 날짜와 함께 매일 다른 키워드를, 그 아래에는 키워드에서 뻗어나간 엄마의 생각들로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워두셨다. 평소 유려한 필력과 표현력을 자랑하는 엄마가 흘림체로 꾸밈없이 써 내려간 문장들이라 오히려 마음에 가깝게 와닿았다. 엄마만의 감성과 견해, 엄마의 인생, 가치관들이 그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었다. 잠들지 못하던 새벽에 엄마의 수첩을 읽던 나는 피식 웃기도, 또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여백>

뭉게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아란 하늘

이파리 떨군 늦가을 감나무

한옥의 처마 끝

초저녁 외롭게 떠있는 초승달

뜨거운 태양을 이고 묵묵히 걷고 있는 낙타 무리들

바닷가 모래알 사이에 나란히 새겨진 두 발자국

마음 한구석에 숨겨놓은 내 마음의 보석상자

......


<밥>

밥은 엄마의 사랑이다. 기다림이다. 그리움이다. 정성이다. 고단함이다. 사무침이다. 마음이다. 행복이다. 따뜻함이다. 가족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다.

버려지는 밥은 수없는 생명들의 가난한 몸부림.

어린 날 매서운 바람 속에 학교 다녀온 뒤 이불속에 꼭꼭 묻어 놓은 밥그릇을 보면 엄마의 품처럼 따뜻했다.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자식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엄마들은 하나같이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다 한다.

.......


<동그라미>

축구하는 아이들. 이슬방울. 휘영청 밝은 달. 무지갯빛 비눗방울. 분수대에 던져놓은 동전들. 88 올림픽 굴렁쇠. 잔잔한 물에 일어나는 파문. 달콤한 눈깔사탕. 반짝이는 눈망울. 동그랗게 퍼져가는 종소리. 세월의 흔적 나이테. 조개의 진주알. 추억의 구슬치기. 초가지붕의 둥근 박...



 수첩 속 세상은 엄마가 앉아있던 사무실과는 다른 곳이었다. 엄마가 일하던 시절을 돌이키면 엄마의 상한 얼굴만 떠올랐는데, 엄마는 그 와중에도 엄마만의 고유한 세상을 지켜나가고 있었구나. 잘 떠올려보니 엄마는 일 역시 그런 방식으로 적응해 나갔다. 엄마가 사무실을 지킨 지 몇 년이 지나자 엄마의 진솔한 면을 알아보고 다시 찾아주시는 손님들이 생겼다.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시 찾아준 손님들을 보며 엄마는 위로받았다. 엄마만의 방식으로 손님들에게 믿음을 주고 그걸 돌려받으며 10년을 버틴 것이었다.


 마냥 여려 보였던 엄마는 나보다 30년을 더 산 인생의 선배였다. 어떻게 하면 힘든 시간을 조금 더 지혜롭게 보낼 수 있을지 궁리하는 어른이었다. 스트레스를 건전한 방식으로 이겨내보려 했던 엄마의 기록들을 읽으며 '참 우리 엄마답다'라고 생각했다. 엄마다울 수 없는 공간, 엄마다움이 방해가 되는 그 공간에서도 엄마는 자신만의 감성과 방식을 지켜나갔다. 독침에 쏘여 퉁퉁 부어버린 마음 위에,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낸 약초들을 한데 모아 톡톡 올려두던 엄마. 그동안 엄마를 나의 '부모'로만 보았지, 막상 엄마라는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동등한 눈높이에서 바라볼 기회가 없었다는 걸, 엄마의 지극히 사적인 기록들을 훔쳐보며 알게 되었다.


 은퇴한 엄마는 여전히 엄마다움을 지키며 지내고 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아름답다.





커버 사진/ 필름카메라 Olympus PEN EE-3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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