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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괜찮다는 무책임한 말 말고

수영을 하다가

by 온정

요즘 운동을 통 못 했다. 뼈와 관절에 자꾸 문제가 생기니 조심스러워서였다. 이러다 얼마 없는 근육마저 다 빠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관절에 부담이 덜 가는 어떤 운동이든 찾아서 해야 했다.

마침 집 근처에 몇 년간 공사하던 체육센터가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자유 수영을 하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수영복과 수모, 수경과 각종 세면도구를 챙겼다. 문득 다른 수영장에 카드 지갑만 들고 갔다가 동전이 없어 드라이기를 못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금통을 뒤져 동전까지 야무지게 가방에 넣었다.


수영복을 입고 수영장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락스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가볍게 몸을 풀고 물에 들어갔는데, 온도가 생각보다 차가워 혼자 호들갑을 떨었다. 레인의 가장 구석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며 물과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압의 방해를 받아 팔다리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게 얼마만의 유산소 운동이냐. 아직 수영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힘이 쏙 빠지는 느낌 들었다.

기왕 왔으니 열심히 해보자며 두 발바닥으로 수영장 벽을 힘차게 찬다. 잠수를 하고 발을 구른다.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방울 소리가 귀를 때린다. 오랜만에 하려니 폐활량이 따라주질 않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는 말 정도로 퉁치기도 억울하다. 폐에서 숨 공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입속을 가득 채운 뒤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기분이다. 갔던 길을 곧바로 돌아오지 못한다. 편도로 갔다가, 헉헉 거리다가, 겨우 진정되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몇 바퀴를 돌았을까. 수영장 벽에 달린 시계를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직 10분 밖에 안 됐다고? 이렇게 힘든데? 도무지 다시 출발할 엄두가 안 난다. 한 번 가는 데에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 괜찮아. 일단 출발하자. 시작이 중요한 거야. 힘들면 중간에 서서 잠깐 숨 돌리면 되지.'

스스로를 애써 위로하며 숨 참고 출발한다.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다는 걸, 금세 깨닫는다. 중간에 쉴 시간 따위 없다. 잠깐이라도 멈추면 내 뒤를 줄줄이 따라오던 분들에게 큰 민폐가 된다. 힘들어서 파란 수영장 바닥이 노래지는 한이 있어도, 출발했으면 일단 저 끝까지 가야 한다.


무책임한 글을 쓰지 말자고 자주 다짐해 왔다. 별 근거도 없이 '무조건 잘될 거다'라며 긍정을 부추기는 글은 되도록 쓰지 말자고. 내가 출발을 앞에 두고 했던 독백이 그 마음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일단 출발하면 돼. 시작이 반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시작은 결코 반이 아니었다. 시작은 그저 시작점일 뿐 저 끝까지 힘을 쥐어짜며 나아가야 하는 건 온전한 내 몫이었다. 스스로에게 했던 말조차 책임지지 못하는데, 감히 누구에게 긍정을 약속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정도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작이 많고 숨 찬 자유형을 하다가, 그나마 덜 힘든 평영으로 자세를 바꿀 수도 있다고. 그보다 더 힘들면, 그러니까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자꾸 박자를 놓쳐 코와 입에 물이 들어가고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때가 오면, 몸을 뒤집어 배영을 해도 된다고. 누워서 천장을 보며 팔을 젓다 보면 터질 것 같던 심장도 천천히 가라앉을테니.

일단 출발하고 보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 말고, 출발하고 나서도 힘들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직접 부딪히고 눈앞이 노래지는 경험을 해봐야만 또 다른 방법이 떠오른다는 말을, 그런 이야기를 나는 쓰고 싶다.


수영을 마치고 락커 문을 연 뒤에야 집에서 수건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챙겨 온 동전이 무색하게 드라이기는 무료였다. 역시 삶은 나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역시, 사람은 궁지에 몰려보아야만 다른 길을 찾는다. 샤워장에서 머리 물기를 열심히 짜고 털고 또 짜고 또 털었다. 선풍기와 드라이기를 동원하여 몸과 머리를 무사히 말렸다.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체육센터를 나와,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집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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