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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충호 May 06. 2023

이별은 장미가 아니라  별로 빛나야 한다

Torneró by I Santo California

내 스마트폰의 저장공간은 8할 이상이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 1,200 곡 정도된다. 당연히 나의 일상도  자동으로 섞어(shuffle) 들려주는 음악과 함께 시작된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팬플룻 연주와 조화로울지 여부도 생각하면서 듣게 된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팬플룻을 배우면서 나는 다행히도(이건 정말이다!) 이제껏 내가 거의 가까이 한 적 없던 욕심과 친구 맺기를 했다. 좋아하는 노래로 꿈의 연주 목록을 한 줄 한 줄 채우며 헤헤거리고 있는 나를 사랑한다.

내가 주로 듣는 노래들은 팬플룻의 음색을 닮아 있다. 거의 모두 아련하고 쓸쓸하고 슬픔을 자아내는 곡들이다. 하지만 그 노래들은 나를 아프게 하고, 울게 하고, 고독하게 만들지만 결코 나를 외로움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그 아픔과 눈물과 슬픔을 자양한 나의 고독력은 더욱 깊고 건강하게 뿌리를 내린다. 그런데 음악을 듣기만 하다가 악기를 배우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지금까지는 어쩌다 좋은 노래를 듣게 되면 내 가슴을 흔들어 놓은 그 작곡가에 감탄하며 하루종일 그 노래를 들으며 젖은 감정을 말리는 게 다였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연주할 때는 작곡가의 심장 속으로 곧장 들어가는지 정말 당혹스러울 만큼 자주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 연습하며 몇 번의 눈물을 말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남들 앞에서 연주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음악이 원래 노리고자 했던 정서가 내 가슴에 직격타를 날리면 나는 하릴없이 휘청인다. 감상이 간접 경험이라면 연주는 직접 경험에 가깝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의 살갗을 만져보는 신생아처럼 나는 팬플룻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음악을 직접 만져보고 있다. 팬플룻의 (3옥타브를 커버하는) 스물두 개의 관과 입맞춤하며 그 부드러운 촉감이 전해주는 느낌에 전율하고, 목표로 삼은 노래의 악보 속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음표와 쉼표를 헤매면서도 그 방황을 즐기고 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내린 비가 나를 방안에 가두어 놓고 노래를 듣고 팬플룻을 연주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다 문득, 팬플룻 연주를 계기로 더욱 가까워진 음악을 통해 나의 삶을, 사랑을, 문학을, 예술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찾아왔고 오늘 아침에는 브런치 매거진을 새로이 열라는 가슴의 명령도 듣게 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이 모든 게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온전히 재생되고 있는 연애 세포 덕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목적지도 끝도 정해지지 않은 음악 여행을 이제 시작하고자 한다.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의 가장 큰 카테고리 셋은 월드뮤직, 영화음악 그리고 뉴에이지 관련이다. 그리고 내 가슴을 아프게, 황홀경으로 몰아넣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나라 셋을 고르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아일랜드와 그리스 그리고 이탈리아를 꼽는다.

아일랜드 음악은 필 쿨터(Phil Coulter)를 들어보면 느낌이 온다. 저녁놀을 바라볼 때처럼 한없이 아련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한국인의 한(恨)과 어쩜 그렇게도 닮았는지 눈물이 불편하지 않아 좋아한다. 그리스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그들의 음악은 울부짖지 않고도 저항과 슬픔, 분노를 토해낼 줄 알고, 향수와 그리움을 담은 음률은 저 아래 눈물의 삼각주에 닿기까지 결코 우아함을 잃는 법이 없다. 이탈리아는 곧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 이탈리아인들은 슬픔 속에 경쾌함을, 밝음 속에 어둠을 김장하는 법을 알고 있으며, 미소와 눈물을 동시에 우려내는 비법도 꿰고 있다.      




#토르네로(Torneró, I Santo California)

예전부터 워낙 좋아했던 노래라 한 달 전 내 연주 희망 목록에 올리고 덤벼든 곡이다. 중간에 빠른 리듬을 타야 하는 부분 때문에 기겁하기도 했으나 며칠 힘겨운 연습 끝에 겨우 희망의 끄나풀을 잡게 된 곡이다. 이제는 이 한 곡만 연습하는 날이 있을 정도로 연주도 사랑하게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멜로디와 화음 이중주로 연주할 때 온전해지는 곡이라는 사실이다. 머지않아 그런 날도 오리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1975년생인 이 곡은 그동안 생존과 인기라는 두 개의 열매를 거른 적이 없는 만큼 버전도 여럿이다. 이 노래만의 묘한 매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위에서 내가 언급한 이탈리아인의 속성 중 무엇을 앞세울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는 노래이기도 하다. 노랫말의 슬픔을 먼저 받아들여야 할까, 멜로디의 경쾌함에 먼저 몸을 맡겨야 할까. 가능보다 불가능에 더 다가간 남자의 희망을 슬퍼해야 할까, 그 누구에게서 도움받을 수 없는 여자의 외로운 의지를 믿어야 할까.           

그대 눈물을 닦아요. 난 돌아올 테니.
그대가 없는 1년은 얼마나 힘들까.
지금 써 봐요. 기다리겠다고, 시간은 지나간다고.
일 년은 백 년이 아니잖아. 난 돌아올 거야.   

  

애타는 목소리로 울부짖는 이 남자는 지금 어디로 떠나고 있는 걸까. 일터를 찾아 먼 도시로 떠나는 걸까, 아니면 무너지고 있는 전선의 부름을 받은 것일까. 남자가 말한 일 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이별의 숨통을 끊어줄 굳은 맹세가 될 수 있을까. 1년이 100년까지 늘어나지 않을 거라는 그의 믿음은 정말 튼튼한 동아줄일까.   

  

그대가 날 떠난 뒤 내겐 외로움만 남았고
우리 사랑의 아름다운 추억들만 나를 감싸고 있어.
그대가 내게 주고 간 장미꽃은 말라버렸어.
난 결코 끝까지 읽지 않을 책 속에다 그걸 끼워놓았어.  

   

여자는 지금 무엇을 하다 허스키한 독백을 뱉어내고 있는 걸까.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작정했던 사진첩을 꺼내 아름다운 추억을 원망하며 울고 있었을까. 읽지 않겠노라 결심했던 그 책을 꺼내 차마 펼치지는 못하고 시든 장미꽃이 힘겹게 만들어준 책갈피를 보며 눈물짓고 있었을까.

사실 여인의 독백이 돋보이도록 라임라이트를 비추는 이 대목에선 노래가 그러했듯이 연주도 쉬어가는 게 보통이지만 나는 그녀와 동행하는 걸 선택했다. 적적한 오솔길을 걸을 때 들리는 새 한 마리의 노래처럼 그녀의 독백이 너무 쓸쓸하고 애잔하기 때문이다. 이슬비 내린 오솔길을 홀로 걷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오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대신, 나는 한 옥타브를 낮춰 최대한 가장 낮은 음색을 만들며 그녀의 쓸쓸한 독백이 다치지 않도록 받쳐주려고 애를 쓴다. 내겐 눈물을 감춘 울음이다.



   

#볼베레(Volveré, Diego Verdaguer)

이탈리아어 원곡을 멕시코의 인기가수가 스페인어로 바꿔 부른 번안곡이다. 스페인어 사용인구가 워낙 많다 보니 스페인어권에서는 이 노래가 원곡을 밀어내며 인기를 누린다고 한다. 원곡의 느낌 그대로를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



내가 연습하기 위해 반주로 고른 버전은 #오카리나 연주자가 올린 곡이다. 침략을 받은 조국의 위기에 전선으로 달려가는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이 안타까웠는지 그가 올린 썸네일(thumbnail)에서는 파랑과 노랑 두 줄의 우크라이나 국기가 보이고 군인의 비장한 외침이 들린다.

위험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달려가는 상황에서 이별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젊은 남녀. 그들의 미래를 짙은 안갯속으로 몰아넣은 공포와 불안이 반세기 전 노래를 빌어 나날이 쪼그라들고 있는 희망의 불씨를 붙들고 있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시대에 평화로움 대신 한 세기 전에나 어울릴 법한 혼돈과 상실이라니...

1년 전 전장으로 떠난 우크라이나 젊은이는 돌아올 수 있었을까. 사랑의 추억에 기대어 외로움을 버티며 편지를 쓰던 연인과 재회할 수 있었을까.

     

페이드 아웃(fade-out)되며 끝나는 이 노래의 마지막 끝 소절, 가장 높은음 ‘솔 솔솔 미레’에 다다를 때면 연주자 또한 절규에 가까운 호흡을 거칠게 쏟아내고는 두 눈을 감는다.

그 젊은이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그 여인이 무너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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