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충호 May 14. 2023

팬플룻의 음빛깔을 닮은 그리스의 흰 장미

Pardonne-moi by Nana Mouskouri

나에게 나나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샹송 가수(당연히 프랑스인인 줄 알았다) 나나 무스쿠리(Nana Mouskouri) 그리고 자유와 사랑을 노래하는 그리스인 나나 무쉬후리(Nana Moushouri).

클래식, 재즈, 팝, 민속 음악, 영화 음악, 오페라 아리아, 가스펠, 샹송, 칸초네 등 다양한 장르를 커버하는 3억 5천만 장에 달하는 음반 판매 기록과 100만 장 이상 팔린 밀리언 셀러곡이 300개가 넘는 음악계의 전설. 그녀가 발표한 노래 1,500여 곡을 나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내 마음을 감전시켰던 찰나의 순간들을 고백하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다.



          

#Enas Mythos(어떤 이야기)

내 기억 속 그녀의 잘못된 국적을 정정하게 해 준 노래다. 그리스 아테네의 고대 석조극장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에서 열린 그녀의 고별 공연 실황을 우연히 보다가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진중한 북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신명 나는 장단에 올라탄 나나는 지극히 그리스적인(동시에 한국적인) 여유로움으로, 아주 우아하게 내가 모르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당신에게 이야기 하나 들려줄게요
우리가 어렸을 때 배웠던 이야기죠
옛날 옛적에 어떤 남자가 살았는데
황야로 떠났대요     

그 뒤로 줄곧 그는 산에서
사냥하며 살았대요
그리고 여자들을 증오해서
마을로 내려오지 않았대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도 하나 해드리죠
옛날 옛적에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집도 갈 곳도 없었어요     

그는 남자들에게는 반감과
끔찍한 증오심을 가졌지만
모든 여자를 사랑했던 것 같아요
내 생각으론 그래요


내가 사랑했던 나나의 정체성을 그녀의 은퇴 공연을 통해 알게 되다니...

제우스의 탄생지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열여섯의 나이에 예술학교에 들어가 마리아 칼라스를 들으며 오페라 가수를 꿈꾸던 소녀. 친구 따라 재즈클럽에서 노래했다가 담당 교수에게 들켜 음악학교에서 쫓겨난 학생. 그녀의 전화위복 혹은 새옹지마 인생사는 계속된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리스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하여 추방당하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20년 가까이 해외 살이 하며 자유와 사랑을 노래했던 아테네의 흰 장미.

그리스인의 정서를 편애하는 내가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다.     




#Plaisir D’amour(사랑의 기쁨은)

사랑의 기쁨? 정직하지만 아쉬운 한글 제목이다. 원곡은 18세기 마르티니가 작곡한 성악곡인데 (오늘날 찬송가집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원제목을 다는 대신 가사의 첫 줄을 제목으로 삼는 관례를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주부와 술부의 순서로 작동되는 서양의 언어와 달리 한글의 언어 구조는 매우 자유롭기 때문에 조금은 친절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기쁨을 제목으로 뽑은 글에서는 오롯이 현재 진행형인 행복과 미소를 기대하지, 슬픔이나 분노를 기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곧 술부가 따라올 거라는 암시를 담은 주격 조사  ‘은/는/이/가’ 정도만 담아줬어도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쁨을 엿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기쁨 말고도 다른 감정을 양념으로 쓸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이지만
사랑의 슬픔은 영원하죠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많았다. 하지만 ‘Plaisir D’amour’에 가장 잘 어우러진 목소리는 단연코 나나다. 『Love Story』의 작가 에릭 시걸(Erich Segal)이 쓴 소설 『Man, Woman And Child』를 스크린에 담은 최루성(tear jerker) 영화 <7일간의 사랑(1983)>이 이에 대한 반증이지 않을까. 영화의 여운은 나나의 노래로 여전히 가슴과 머리에 남는다.   


#영화를 보다가 곁길

비록 영화 속에서 사랑의 기쁨과 슬픔에 관한 오래된 노래라는 짧은 설명이 있긴 했지만 결혼식 하객들이(그것도 프랑스인들이) 가두 행진하며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26:19)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미국의 제작진이 이 장면을 넣은 이유는 아마 두 가지일 것으로 추측한다. 영화의 주 테마곡으로 선택한 곡의 노랫말을 복선으로 활용하기 위함이거나 나나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끌어올리는 극적인 효과를 노렸기 때문일 것이다. 노랫말 때문에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곡이 종종 결혼식장에서 연주되고 있는 데는 이 영화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부정적 노랫말도 나나의 목소리로 들으면 감미로운 속삭임처럼 들리는 건 나에게만 그런가...   




#Pardonne-moi(나를 용서해 주세요)

내가 연주한 나나의 첫 번째 곡이다. 플랫(♭)이 두 개 붙긴 했지만 빠른 곡조가 아니라 충분히 따라갈 만하다.

기도하는 어린아이처럼 절제된 나나의 목소리는 사랑의 부재로 추위에 떨기도 하고, 불구덩이를 향해 걸어가는 순교자처럼 담담하다가, 끝내 광기로 치닫는 광인처럼, 생명을 바라는 새로운 탄생처럼 폭발한다.

     

나는 부드러운 마음과 빈손으로 옵니다
나는 당신이 더 이상 오지 않기 때문에 옵니다
나는 기도하는 어린아이처럼
시선을 떨군 속죄자처럼 옵니다

용서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당신을 기다릴 때 너무나 추웠어요
용서해 주세요 당신에게 애원하는 나를
용서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나는 신을 향한 전도자처럼 옵니다
나는 불구덩이를 향한 순교자처럼 옵니다.
나는 광기를 향한 광인처럼 옵니다
생명을 바라는 새로운 탄생처럼     

용서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당신을 기다릴 때 너무나 추웠어요
용서해 주세요 당신에게 애원하는 나를
용서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팬플룻은 이 곡의 느낌을 전달하기에 적격인 악기이다. 나는 다른 반주를 찾지 않고 나나의 가슴 아린, 신비한 목소리를 고스란히 따라가며 연주한다.

단언컨대 나의 연주 목록 속 나나의 노래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별은 장미가 아니라  별로 빛나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