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9일.
당시 내 나이, 아직 만 스무 살.
한겨울이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내 마음은 얼떨떨하고 뜨거웠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직장인이 된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창업한 회사를 대웅 관계사에 매각하고, 인수된 회사의 직원으로 첫 출근한 날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표이사였던 내가,
성공을 기대하며 창업했던 내 회사 문턱에서
실패라는 구덩이에 빠져 몸부림치던 내가,
회사를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피인수 계약서를 작성했고,
오늘은 한 기업의 출입증을 목에 걸고 계단을 오르기 위해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다시 한번 꿈을 펼치다 실패한 한 청년을 거둬주시고 기회를 주신 회장님께 감사하다.
감사하게도, 지금 돌이켜보면 대웅제약 윤재승 회장님께서 나를 꽤 아껴주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마음을 온전히 느끼기 어려웠다.
“왜 나를 인수하신 걸까?”
“혹시 나를 싫어하시는 건 아닐까?”
심지어 “날 괴롭히려는 건 아닐까?” 같은 생각도 들었다.
불안과 의심이 섞인 생각들에 스스로 지치기도 했던 시기였다.
그 무렵 대웅제약은 기존의 ‘약을 파는 제약회사’를 넘어서,
‘환자의 건강을 돕는 헬스케어 기업’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디지털 치료제 분야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고,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만성질환자를 위한 앱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됐다.
당시 나는 그 프로젝트의 기획자이자 PO(프로덕트 오너)로 참여했다.
여러 계열사 대표님들과 사업부장님들이 참여하는 회의에,
나는 막내로 참석했다.
회의록을 작성하고, 시장조사를 정리해 오고, 앱 기획안을 발표하고,
또다시 피드백을 받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회의는 대부분 대형 원형 테이블에서 진행됐고,
그 중심에는 회장님이 앉아 계셨다.
임원들이 빙 둘러앉아 있는 그 자리에 나는 항상 긴장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혼나겠지’
회의 전부터 마음속에서 이미 작아진 채로 앉아 있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나는 오늘, 대웅제약에서 일했던 짧지만 밀도 높은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특히 윤재승 회장님과 주요 임원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판단했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돌이켜보면, 그 짧은 기간 동안 내가 보고 배운 것들이 지금까지도 내 안에 뿌리처럼 남아 있다.
어쩌면 내가 이 글에서 쓰게 될 이야기들은, 결국 회장님이 내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가르쳐주신 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방식들은, 내가 대웅제약을 퇴사한 후
6년 가까이 회사를 망하지 않고 버텨내고,
다시 한번 창업에 도전해 작은 성공의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대웅제약 윤재승 회장님은 회사를 물려받은 분이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회장님은 공부로 승부해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검사까지 지낸 이력이 있는 분이셨다.
내가 느낀 회장님은, 철저히 노력으로 쌓아 올린 사람, 그리고 일을 대하는 자세가 각별한 사람이었다.
그런 분이었기에, 회사를 경영하는 방식 역시 치밀하고 집요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셔서 시간 단위로 계열사 대표, 임원, 실무진들과 일일이 만나며
각 사업의 상태를 직접 파악하셨고, 때로는 말단 직원과도 대화를 나누셨다.
업무 파악을 위임하지 않고 스스로 끝까지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점심시간에도 회의는 계속됐다.
비서실에서는 늘 저혈당 예방식이나 건강식을 회의실로 준비했고,
식사 중에도 핵심 이슈는 놓치지 않으셨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고 나면 “혈당 높아졌을 테니 스쿼트나 한 세트 하자”며
직원들을 일으켜 세우는 유쾌한 모습도 종종 보여주셨다.
일은 무섭게 하셨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당시 디지털헬스케어 앱 프로젝트의 PO로 참여하고 있었고,
동시에 화장품 사업부 제품개발 팀장도 겸직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제품은 늘 회장님 앞에서 직접 설명하고, 보고 드려야 했다.
그런 자리에서 얼버무리거나, 과장하거나, 증거 없이 주장하는 것은 절대 통하지 않았다.
회장님은 제품의 임상 논문을 직접 요청하셨고,
나에게는 그 과학적 기초를 이해시키는 수준의 설명을 요구하셨다.
기초가 부족한 상태로 들어가면 바로 질문이 날아왔고,
그 질문에는 명확한 답을 갖고 있어야만 했다.
‘그냥 넘어가는 회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주말마다 논문 수십 장을 출력해
근처 카페에 앉아 형광펜으로 칠하고, 내용을 외우고, 자료를 재구성하는 시간을 반복해야 했다.
그 과정을 통해 진짜로 학습된 상태에서 회의에 임하는 법을 몸으로 익혔다.
회의가 끝나면 나는 회의록을 정리했다.
당시 사원증에는 녹음 기능이 있었고,
그걸 활용해 회장님과 임원진의 대화를 토씨 하나 빠짐없이 받아 적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회의 도중 A를 얘기하다가 B로 갔다가 다시 A로 돌아오기도 하니까,
나는 회의록을 주제별로 재배치하고,
해야 할 일 / 결정된 내용 / 남은 과제 등을 정리해
다음 회의 때까지 읽기 쉽고, 보완할 여지가 없게 만들어야 했다.
중요한 부분은 굵게 표시했고, 정부 문서 형식처럼 1. / 1) / (1) / 가. 나. 다. 등으로
문서의 계층 구조도 정리했다.
회장님이 자주 읽으시는 신문 폰트를 찾아 회의록에 적용했고,
출력본도 신문 크기에 맞춰 가독성을 최대한 고려했다.
그건 단지 회장님을 위한 예의가 아니라,
어떤 사람과 일하더라도 질문이 생기지 않게, 완전히 이해 가능한 문서를 만든다는 기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다.
회의록 하나에도 ‘몸부림’을 쳐야 한다는 태도는,
단순한 성실함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그때의 기억들은 지금 내가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그대로 영향을 끼친다.
회의 전에 자료를 보내고, 그 안에 어떤 질문이 들어올 수 있을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자료를 디자인할 때도 “이 문서를 처음 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를 먼저 생각한다.
회장님은 늘 이렇게 가르쳐주셨다.
“일을 대충 하지 마라. 일에는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그 말은 지금도 내가 팀원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되었다.
윤재승 회장님은 항상 ‘이 일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셨다.
어떤 일이든 그 목적과 취지가 선명하지 않다면,
겉보기에는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아도 결과가 어그러지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단지 위에서 시켰기 때문에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왜 필요한지, 무엇을 해결하고자 하는지를 실무자 스스로 이해하길 바라셨다.
이유를 모른 채 일하면 몰입이 생기지 않는다.
반면, 목적과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면,
오히려 지시된 방식이 비효율적일 때 더 나은 방법을 제안할 수 있다는 것도 강조하셨다.
현장의 관점에서 더 효과적인 해결책이 있다면, 실무자가 거꾸로 역제안을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실무자였던 나는 거꾸로 역제안을 꽤나 많이 제안했고, 거절도 많이 있었지만,
흔쾌히 새로운 방법을 통해 효과적으로 일을 한 경우도 있었다.
회장님은 늘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가를 두려워하지 마라.”
일이 잘 되고 있는지 확인받는 것을 회피하다 보면,
고객 응대는 늦어지고, 보고도 늦어진다.
그렇게 되면, 방향을 잘못 잡은 채로 계속 달리게 된다.
그래서 회장님은 “일단 평가를 받아라. 평가가 있어야 방향을 잡을 수 있다”라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일이 어그러진다면, 즉시 ‘비상’을 걸라고 하셨다.
회사는 얼렁뚱땅 좋은 게 좋은 거지 생각하며 있는 조직이 아니라,
늘 가치 앞에서 여러 경쟁과 승부를 필요로 하기에 스포츠와 전쟁과 유사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건 지금 내가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팀원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다.
“뭔가 잘 안되면 즉시 알려달라. 혼자 끌지 말고 도움을 요청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은 조용히 뭉개지고, 결국 더 큰 손해로 돌아오게 된다.
실무자가 비상을 정확한 시기에 공유만 해준다면,
경영진이 해당 내용을 갖고 직접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 줄 수도 있기에,
최대한 같은 편으로서 비상 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빠르게 공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당시 나는 한 디지털 헬스케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고,
회의에는 여러 계열사 대표와 사업부장, 실무 임원들이 참석했다.
원래는 격주로 한 번 열리던 미팅이었지만,
회장님이 직접 비상을 거신 이후, 회의는 주 2회로 늘어났다.
수요일 오전 : 전반적인 상황 보고
수요일 오후 ~ 목요일: 피드백을 반영한 작업
금요일 오전 : 수정된 안 재검토 및 논의
금요일 오후 ~ 화: 다시 업무 재개 (보통 주말도 틈틈이 파악)
이 구조를 통해 우리는 하루 단위로 방향을 점검하며 일할 수 있었고,
모든 내용은 회장님께 세세하게 직접 공유되었다.
그만큼 회장님도 이 프로젝트에 실무자로서 깊이 참여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 내가 배운 것은 단 하나였다.
“경영진이 실무 키를 잡고 있어야 한다.”
단지 ‘결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 데이터와 피드백을 매일 읽고, 판단하고, 움직이는 사람.
회장님은 그런 리더였고,
그렇게 움직이는 조직은 속도가 다르고, 방향도 잃지 않는다.
지금 글로벌 기업들을 봐도,
애플, 엔비디아, 테슬라처럼 살아남은 조직들의 공통점은
전통적인 의장이 아니라 ‘Founders Mode’를 유지한 실무형 리더가 중심에 있다는 점이다.
회장님이 가장 싫어하셨던 건 거짓말과 과장된 보고였던 것 같다.
실무자의 입장에서 잘못이 윗선에 있다면, 그걸 감싸기 위해 진실을 감추는 일도 단호히 금지하셨다.
누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명확히 공개하고, 그에 따른 책임 구조를 투명하게 가져가길 원하셨다.
정보 전달에 있어 누구에게도 유리하거나 불리한 편향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셨다.
아마 검사 출신이셨기 때문일까.
회의 때마다 회장님은 종종 ‘검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한 번은 인테리어 공사가 끝난 공간을 둘러보던 중, 벽에 붙은 “방염” 스티커를 보시고
“이건 왜 안 뗐나"라고 물으셨다.
책임자는 얼버무리며 “법적으로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답했는데,
회장님은 “그 법적 근거를 다음에 가져오십시오”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그 자리를 모면하려고 ‘그럴듯한 말’을 하는 것보다,
“그 부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태도였다.
나도 회장님의 포스에 기가 죽어 순간적으로 얼버부리는 일들이 많았고,
그럴 때면 다시 회장님실을 찾아가 정정하고 혼나더라도 최대한 내 죄를 내가 알리고 싶다는 자세로
정보의 투명성에 있어 모두가 100% 정확하게 공유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회장님은 보고를 받을 때 항상 구체적인 수치와 객관적인 근거를 요구하셨다.
내 생각이나 의견만으로 정리된 보고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마도”라는 말은 금기였다.
그 덕분에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도
그저 ‘좋은 생각’이 아니라 시장 데이터, 논문, 고객 피드백, 유사 사례 등
가능한 모든 근거를 찾고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 습관은 지금도 내 업무의 기본 태도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회장님이 강조하신 것들은
사실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였다.
일을 시작할 땐 그 목적을 이해하라.
평가를 피하지 마라.
문제가 생기면 즉시 알리고, 도움을 구하라.
거짓 없이, 근거를 갖고 말하라.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말들이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선 그 기본을 지키는 게 참 어려웠다.
나 역시 그걸 지키는 데 늘 버겁고, 두려워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기본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가, 리더와 조직을 오래 가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힘이라는 것을.
회장님은 종종 나에게 물으셨다.
“몸부림치고 있어?”
“가슴 뛰게 일하고 있어?”
솔직히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일하는데 왜 몸부림까지 쳐야 하나?’
그냥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생각도 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직장인들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알게 됐다.
내가 경영진이 아니고, 월급은 정해져 있더라도
회사가 살아야 내 밥그릇도 살아남는다는 걸.
조직이 성과를 내야 내가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스타트업을 시작한 지금의 내 입장에서 돌아보면,
직접 창업하는 것보다 오히려 기업 안에서 창업이 더 유리할 때도 있다.
인프라가 갖춰져 있고,
협업할 수 있는 기술팀, 마케팅팀, 영업조직이 이미 존재하는 환경이라면,
그 안에서 충분히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조직 안에서 제대로 ‘성공’ 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도 몸부림을 쳐야 했다.
내가 특히 가까이서 보며 배운 세 분이 있다.
서종원 계열사 대표님과 이창재 부사장님
그리고 박수현 사업부장님.
(지금은 이창재 부사장님께서 대표님이 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진짜 어마어마한 레전드셨다.)
세 분을 보면서, 정말 이렇게까지 일할 수 있구나를 느꼈다.
박수현 사업부장님과는 특히 자주 함께 일했다.
운전면허가 없던 나는 출장 때마다 부장님과 함께 차를 탔는데,
항상 자료를 빠짐없이 챙기고, 실무진이 준비한 자료까지 철저히 학습하고 계셨다.
병원 미팅을 마치고 늦은 밤 본사로 돌아오는 길이면,
기진맥진하셨을 텐데도
“내일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오늘 일은 어떻게 흘러갔나”
를 계속 곱씹으며 생각하고 계셨다.
어느 주말, 내가 자발적으로 출근했을 때
우연히 사무실에 와 계신 부장님을 보고 놀란 적도 있다.
“이분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일하실까?”
그땐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회의 중 실무진의 실수로 회장님께 혼이 나셨을 때,
뒤에서 눈물을 훔치시면서도
오히려 우리에게 따뜻하게 위로와 격려를 건네셨다.
“제발 잘해보자”라고, “우린 할 수 있다”라고.
혼자 인내하며 우리를 끌고 가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오죽했으면 "제발"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내가 퇴사할 무렵,
직접 인사를 드리러 찾아뵈었을 때
박수현 사업부장님은 ‘잠룡물용(潛龍勿用)’이라는 사자성어를 적어주셨다.
“용은 조용히 물 안에서 때를 기다린다.”
꼭 성공하라고, 어디서든 몸부림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
회장님은 일을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셨다.
특히 성과를 내 업적으로 치장하거나,
“서프라이즈 하듯이”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방식을 매우 경계하셨다.
“제가 이만큼 해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을 뒤늦게 공개하며 공을 챙기려는 자세는 철저히 배제하셨다.
그보다는 일이 진행되는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공유되고,
조직 전체가 방향을 함께 점검하며 움직이기를 원하셨다.
회장님에게 있어 일의 목적은 “조직이 살아남는 것”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누가 했든, 어디서 시작됐든,
중요한 건 이 일이 회사 전체에 어떤 가치를 주는가였다.
그래서 그는 리더가 되더라도
공을 직원에게 주는 방식조차 허례허식 없이, 본질에 집중하길 원하셨다.
업적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고, 어떤 방향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지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회장님은 늘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주인’이란 말은 공을 챙기기 위한 명분이 아니었다.
“이 일이 잘됐으니, 이제 내가 주목받아야지.”
그런 식의 흐름이 아니라,
“일이 잘됐으면, 빨리 다음 일로 넘어가야 한다.”
그게 진짜 주인의 태도라는 걸 반복해서 가르쳐주셨다.
돌이켜보면,
그 짧았던 대웅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회사에 다녔다’는 이력이 아니라,
일과 사람, 조직과 성과를 바라보는 나의 기준을 만들어준 시간이었다.
그때 배운 것들은
지금 내가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매일같이 되새기게 된다.
빠르게 공유하라, 몸부림쳐라, 허례를 경계하라,
일의 목적에 집중하라, 평가를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도 나는 팀원들에게 자주 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신 얘기를 꺼낸다.
내가 직접 창업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지금조차
그때의 회의 방식, 문서 작성 습관, 비상에 대응하는 리듬이
고스란히 내 일의 방식이 되어 있다.
그 시절,
때로는 억울하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고,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던 그 몸부림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몸부림치고 있어?”
“가슴 뛰게 일하고 있어?”
이 질문에 당당히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여전히 제대로 일하고 있는 거라고 믿는다.
덕분에 나는 26살이 된 지금,
회사를 망하지 않고 생존시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