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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라는 말이 없는 세계

우리가 흔히 쓰는 ‘눈치’라는 단어는 영어에 없다.

정확히 말하면, 번역은 가능하지만 그 단어가 품고 있는 결처럼, 숨결처럼 흐르는 감각은 그대로 옮길 수 없다. 눈치는 어쩌면 한국이라는 문화가 오래도록 길러온, 보이지 않는 촉수 ... 같은 능력이다.


영어로는 tact, social awareness, reading the room 같은 표현들이 있지만 그 말들은 전부 혀끝에서만 머물고,

눈치는 가슴과 피부와 배 위의 공기로 느끼는 것이다.


눈치는 상대의 말 뒤에 숨어 있는 맥락을 듣는 능력,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분위기를 예감하는 능력이다.


어떤 이는 눈치를 “껍질 깨지기 직전의 계란을 손에 쥐고 걷는 일 같다”고 한다. 조금만 세게 쥐어도 깨질 것 같고,

너무 느슨하면 떨어질 것 같다.


눈치란 바로 그 균형의 기술이지 않을까.

한국인만 갖고 있는 특유의 문화로 길러진 초능력.


우리는 대화 속에서

말하지 않은 단어의 무게를 먼저 살핀다.

숨을 멈춘 미세한 순간,

눈동자가 흔들린 0.1초,

컵을 내려놓는 작은 소리까지 읽는다.


그건 마치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귀로 듣는 것과 비슷하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잎사귀가 흔들리는 결을 보면

이미 우리는 다음 순간을 안다.


눈치는 그래서 언어가 아니라 기술이고, 기술을 넘어 태도다.

상대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이 공간이 지금 어떤 온도인지,

내가 지금 한 걸음 물러서야 하는지

아니면 조용히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

그 전체를 한순간에 계산하지 않고 직감하는 능력이다.


영어권 문화가 ‘나’를 중심으로

나의 감정, 나의 표현, 나의 의도를 명확히 말하는 데 익숙하다면,

눈치의 문화는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말과 말 사이에 걸려 있는 끈을 살피고,

표현보다 공존을 먼저 고려한다.


그래서 눈치는 종종 오해받는다.

“왜 이렇게 복잡하냐”고.

“그냥 말하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눈치는 복잡한 게 아니라

섬세한 것이다.

이 섬세함은 관계를 더 오래 지속하게 하고,

갈등을 미리 완화시키고,

사람이 사람에게 건너가는 다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눈치는 어쩌면

관계의 기상예보다.

구름의 밀도만 보아도

비가 올지, 바람이 불지,

우리가 우산을 들고 나가야 할지를

조용히 알려준다.


눈치는 또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배우는 마지막 감각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는 말하는 것만 듣지만

어른은 말하지 않는 것을 듣는다.

어린아이는 표정을 보고 웃음을 해석하지만

어른은 미소 뒤의 주저함까지 읽어낸다.


눈치가 영어에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단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눈치는 한국인의 삶, 관계, 공동체 속에서

수백 년 동안 정제된 문화적 기술이기 때문에

언어 하나로 담아낼 수 없다.


눈치를 가진 사람은

말이 없어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다.

불필요한 장식 없이도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눈치는 그래서 단어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민감성이며 인격의 결이다.


단어 하나가 사라져도

눈치라는 세계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 감각을 가진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세상을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난 눈치 보는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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