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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Oct 26. 2023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

renewal.4 장애를 가지고도 살아가는 방법

-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

 "장애의 정도가 심한"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것이 말장난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든다. 차라리 중증, 경증이 훨씬 나아 보이는 말, 그러나 나는 이 말에 속하는 장애인이다.


-  17년 차 장애인이다.

 나는(이 정도면 부장급 연차인 건가...) 참, 길게도 버텼다. 앞으로 버텨야 할 해가 더 많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슬슬 나도 익숙해졌다. 내가 한 팔을 못 쓴다는 것이, 내 일상과 습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장애인임을 매번 다시 인지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이 아플 때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게 되었을 때가 몸이 가장 치료를 필요로 할 때였다. 기억 상 6~8개월 즈음을 병원에서 살았다. 이 시기 동안 내가 느낀 것은 끝없는 좌절이지만, 내가 좌절하면 안 된다는 강렬한 의무감도 생겨버렸다. 12살의 나이에 나는 급작스럽게 오른손의 기능을 잃었다. 오른손잡이에게 오른손을 뺐으면, 그 어린 초등학생은 할 수 있는 게 없어진다.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글씨를 쓰는 것 하나도 왼손으로 능숙하게 할 수 없어진다.(왼손에도 링거를 맞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나는 갑작스럽게 몸만 커버린 아기가 되었다. 모든 걸 엄마에게 의존해야 했다. 모든 걸 혼자서 안 해도 돼서 편했지만, 아무것도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것은 겁이 났다. 언제까지나 오른손이 낫기만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의사는 어정쩡한 대답으로 부모님을 희망고문하고, 나는 그런 부모 밑에서 부담감과 책임감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이때의 나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하는 장애인이었다. 다친 것을 어서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한순간도 빠짐없이 내가 장애인임을 직면해야 했다.


 다친 순간을 제외하고도, 여전히 몸이 다치고 아플 때마다 나는 장애인임을 끊임없이 인지한다. 특히나, 왼손에 이상이 생긴 경우에. 왼손이 아파서 그 어떤 손도 쓸 수 없을 때, 나는 굉장한 무력감을 느낀다. 다시금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아기가 된 것마냥.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도 당연히 박탈당한다. 그저 왼손이 아플 뿐인데, 오른손은 이미 못쓰기에 나는 양팔을 모두 쓰지 못하게 된다.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손으로 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핸드폰 하나를 들지 못하고, 컵 하나, 젓가락 하나를 들기 어렵고, 핸들 역시 잡지 못한다. 할 수 있게 만든 것들을 다시 할 수 없게 될 때마다 나는 또다시 끝없는 "좌절감"을 느끼고, 이미 망가진 왼손을 보면서 앞으로의 대한 "불안"을 마주하고, 이 모든 것에 답이 없다는 결론을 통해 "무기력"에 빠져든다. 장애인이라는 사실은, 아프다는 진실은,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라는 결과는 편견이나 차별을 제외하고도 생각보다 더 잔인하다.


 하지만 사실상 이런 내가 받을 수 있는 복지는 없다.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체 장애인을 휠체어를 타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복지체계가 운영되기에, 나는 이 나라의 어떤 복지적 도움을 받지 못한 채로 그저 다친 오른손을 쓰게 만들거나, 아픈 왼손이 낫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삶은, 시간은 내 편이 아니다. 정말 생존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아파도, 무리가 되고, 더 망가지더라도 왼손으로 할 수밖에 없다. 장애는 결국 다른 장애를 더 쉽게 낳는다.


 사고를 당한 것은 내 탓이 아니었지만, 무엇을 해야 덜 무너질지 몰랐던 무지는 내 잘못이었고, 어린 나는 사고까지 책임져야 했다. 책임을 져야 하는 나는 어느샌가 사고도 내 잘못이 되었다. 아주 강렬하게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가장 쉬운 나를, 오른팔을 탓했다.     


- 마음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픈 경우는 참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은 아이러니하게 가족과 있는 경우이다. 엄마는 딸과 같이 마트에서 장을 보더라도, 어떤 무거운 모든 짐을 혼자 들었다. 어떻게든, 무리를 해서라도 내 몫의 짐이 남지 않도록. 아빠는 매년 보내는 제사와 차례에서 음식을 매번 스스로 나르기 시작했다. 혹은 나 대신 사촌이나 오빠에게 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오빠에게 그저 팔병신인 동생이 되었다는 것을 어느 날의 다툼에서 알아버렸다. 이 모든 일이 단순히 누군가의 과한 배려, 무시, 악의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배제된 것은 분명히 있고, 그것은 이 모든 일이 문제가 되는 발단이다. 그 누구도, 내 의사를 묻지 않았다는 것.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고 싶은지 아닌지 나와 관련된 일이었으나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잘 안다고 착각하여 벌어지는 일련의 무시가 스쳐 지나가는 타인의 편견보다 나는 너무나도 뼈저리게 아팠다.


 교통사고로 잃은 것은 내 오른팔뿐만은 아니었다. 교통사고는 오른팔을 절단시키면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언제든 죽을 수도 있는 공포, 구급차를 보면 떠오르던 그날의 상황, 누군가에게 더 이상 넘길 수 없는 차량의 통제권, 차량의 덜컹거림에서 오는 불안감 등 나는 생각보다 많은 후유증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일상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서워하고, 덜덜 떠는 것을 반복한다. 구급차를 보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기 전에 이미 신체는 굳어가고, 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어김없이 공황이 찾아온다. 내가 운전하는 차에서도 차가 덜컹거리면 그 밑에 내 팔이 떨어졌던 것처럼 심각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걱정한다. 과거에서 멈춘 사고 장면은 현재의 나를 때때로 데려간다. 그렇게 지금-여기에서 반복될 때마다 내가 심히 다쳤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들었다. 치료를 해도 해도 끝없이 지치게 만드는 감정들은 "사고를 당했기 때문에"로 귀결되고, 결국 내 장애를 탓하게 된다.


 내가 받은 상처는 소독약의 치료 없이, 누군가의 사과 없이 스스로 덮여졌다. 하지만 내 장애로 차별을 당했으나 여전히 화를 내지 못할 때마다, 지나가는 욕을 들을 때마다 다시 염증이 나고, 문드러진다.


-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다치고 나서,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정말 단순한 것이었다. 밥을 혼자 먹는 것, 화장실을 혼자 가는 것, 글씨를 예전처럼 잘 쓰고 싶은 것, 가위질을 걱정 없이 하는 것이었다. 너무 사소해서, 간단해서 이걸 못한다고 인정이 잘 안될 만큼 자잘한 일들이었다. 사소해서 부탁하기 어려웠고, 나만 못한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열등감을 에너지 삼아 정말 수없이 고민했고, 수없이 연습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자존심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탈감만 남았었다. 이렇게나 사소한 것도 연습해야 한다면, 더 어렵고, 더 힘든 일들은 얼마나 연습해야 하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죽어라 노력해서, 겨우 출발선에 선 느낌이었다. 고작 이걸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해야 했던 걸까라는 의문에 답하기도 전에 삶은 또 노력해야 하는 것들을 나열해 보여주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마다 나는 많은 고민을 한다. 얼마나 하고 싶은지를 묻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간 순간부터,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 담임선생님에게 내가 참여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설명도, 결과도 내 몫이었다. 누군가가 대신해주지 않았던, 내 일. 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보다, 할 수 없음을 증명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학창 시절이 지난 후에는 오히려 더 불편함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저 수행평가 하나를 못하는 일이 아닌, 친구들과 같이 추억을 쌓을 수 없는 그런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당구나 포켓볼을 치는 것, 양손을 이용한 게임을 하는 것, 기타나 여러 취미를 배우는 것, 무언가를 만드는 것과 같은 다양한 일상의 제약은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좌절하고 싶지 않았지만, 삶에서 좌절을 뺄 순간이 없었다. 분명 내 친구들의 잘못은 아님에도, 때때로 나는 친구들을 탓하는 12살의 꼬마이기도 했다. 내 친구들 모두가 이기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도 어떻게 배려하는지 배워본 적 없는 것임을 알기에, 모두가 그러한 성장기를 보냈다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았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또 탓할 것이 필요했다. 역시나 나는 또 나를, 장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장애를 가지고도 살아가는 방법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장애를 가지고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한 손이 불편하더라도 타이핑, 칼질, 설거지, 운전 같은 일들도 결국 할 수 있는 일로 만드는 것. 힘들었지만 성공했다. 만약 어린 시절 내가 더 많은 시간을 재활치료에 투자하였다면, 나는 훨씬 뒤에나 지금의 모습을 얻었을 것이다. 때로는 치료를 포기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책임을 진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뼈저리게 아프지만, 스스로 못하는 것들을 나열하니, 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 수 있었다.


 끝없이 나를 탓하면서 끝없이 억울하기도 했다. 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이상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교사가 된 나는 당장의 동료들이 가지는 편견부터 깨 부셔야 한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나와 같은 학생을 만들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상처받은 나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야 했고, 그렇게 내 장애를 다시 마주 보고 있다.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24시간, 매일, 365일이 고통스럽고, 힘든 것은 아니다. 그저 살아가면서 비장애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고민해야 하고, 상처받을 수 있는 일이 더 많고, 내서 해야 하는 일이 더 많고, 좌절해야 할 일이 더 많은 것 뿐이다. 지치게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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