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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an 15. 2024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던걸까?

renewal.5 그 어느 것도 나은 것은 없더라.

고통보다는 통증이 낫다고 말했다.

통증과 고통이 다르다는 것을 너무나도 빨리 알아버렸다. 신체가 정신을 지배하기도, 정신이 신체를 지배하기도 하는 삶에서 나는 둘 다 아픔으로 물들었다. 한때는 물리적인 통증은 참을 수 있다고도 여겼다. 하지만 그것 역시 오만이었다. 그 오만의 대가는 무겁고 쓰라렸다. 그래서 이젠 그 어느 것도 장담하지 못하겠다. 무엇이 더 낫다고. 그저 내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 외에는.            


 처음에는 그래도 참을만했다. 익숙했으니까.

어느 날은 논리적인 이유로, 어느 날은 심리적인 이유로, 때로는 무작정 찾아오는 통증은 항상 나를 괴롭혔다. 10년을 넘게 동고동락해온 오른팔의 조임과 저린 감각, 추운 날씨에 따라붙어오는 뼛속 깊이 느껴지는 간지러움, 내 머릿속 팔과 실제 팔이 매칭되지 않는 감각들이 모두 익숙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자, 순번표를 들고 밀려들어오는 통증들은 점점 더 생겼다. 화끈거리는 작열감, 언제 통증이 올지 모르는 돌발통, 항상 24시간 붙어 다니는 상시통, 통증이 아닌 자극에 통증으로 반응하는 이질통 등을 제외하고도 망치로 뼈를 내리치는 듯한  찌릿함, 칼로 찌른 후에 그 속에서 칼을 비트는 듯한 따끔거림, 유압프레스기에 팔을 넣고 누르는 듯한 욱신거림도 찾아왔다. 그저 비명밖에 지를 수 없는, 일상이 불가능한 정도의 통증으로 나는 일상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었다.            


억세고 끈질긴 통증으로 양손이 묶이기 시작했다.

오른팔만 아팠다면, 조금은 덜 불행했을까? 왼손도 망가지기 시작했다. 스트레스의 최고치를 다다른 22년에는 왼손을 쓰지 못할 정도의 원인불명의 통증이 찾아왔다. 마약성 진통제를 들이부어가며, 보호대로 겹겹이 손을 지지하면서 겨우 손을 써가며 고시를 보기도 했다. 그 여파로, 나는 여전히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잘 굽히지 못한다. 퇴행성 소견과 관절염 진단에도 어울리지 않게 통증이 왼손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이미 고등학생 시절 간 병원에서 의사가 10년 차 3대 독자 며느리의 손목의 상태와 똑같다고 했다. 고작 19살부터 딱딱한 어깨, 늘어난 인대, 염증 난 힘줄, 물혹이 친구처럼 찾아왔다.            


신체적으로 아픈 건 참으로 모든 걸 제한시켜버린다.

그러다 보니, 다친 오른팔도, 쓰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왼팔도 다 싫어졌다. 둘 다 막 대하기 시작했다. 더 잘 관리해 줘야 하는 오른팔은 쳐다보지 않았고, 덜 쓰고 많이 쉬어야 하는 왼팔은 함부로 쓰고, 억지로 힘쓰며 살아왔다. 일상을 가능하게 만든 왼팔이 망가지면 나는 좌절했고, 일상을 불가능하게 만든 오른팔의 통증은 죽고만 싶게 만들었다. 결국 둘 다 어차피 무너질 것 같아서, 억울해서,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이라도 하고 싶었다. 마약성 진통제를 들이붓고, 모르핀을 맞으면서 겨우겨우 연명해갔다. 병원은 더 해줄 수 있는 치료가 없다고 했다. 수술을 권유하는 의사들은 많았으나, 수술을 또 받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통증 수준이 아니다 보니, 심리적인 상태도 점점 피폐해져 갔다. 아파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어서, 흔히 말하는 (마)약쟁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심하게 아프고 나서부터 하고 싶은 걸 떠올릴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도, 해야만 하는 것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제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얼마나 하고 싶은지, 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얼마나 큰일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할 수 없었으니까. 내 욕구와 희망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 꿈을 포기하고 살기 위해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것,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할 일이었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점은 정말 사소한 것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컵을 한 번에 들지 못하는 것, 두 손으로 타이핑을 빠르게 치는 것, 무거운 물건을 안전하게 드는 것, 가위나 칼을 편하고 안전하게 사용하는 것을 못한다는 건 사람을 정말 좌절스럽게 만든다. 너무 작은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되는 바람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창피해지게 만든다. 그래서 무시했다. 하고 싶지 않은 척,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척하며 살았다. 내 욕구를 무시하니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게 되었다.            


대부분은 대신해 줌으로써 나를 도와준다.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그저 도움만 주면 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사실 두 컵을 옮기는 것은 한 손으로 두 번 반복하면 되는 일이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타자를 치는 것도 지금은 300타 이상으로 두 손으로 치는 사람들보다 더 빠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지인들은, 심지어 가족들도 도움을 주었으니 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버린다. 방법을 고민하고 노력해서 "스스로" 해결하는 것과 타인이 대신해 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이것은 잘못된 이해로부터 발생한 것이고, 거기서부터 내 정신적 고통은 시작되었다.            


나의 꿈은 초등 교사이기도, 화이트 해커이기도, 중등학교 교사이기도 했다. 내가 본 초등학교 교사는, 화이트 해커는 두 손을, 양팔을 다 써도 버거울 때가 많았다. 학창 시절의 나는 꿈을 포기하자니 삶의 의욕이 떨어지고, 꿈을 이루려 하자니 너무 불가능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초등학생이 우울함에 빠져있을 때,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다친 나는 시간만 흐르면 이전처럼 다시 팔을 쓸 수 있을 거라는 얼토당토않는 거짓을 믿기 시작했다. 일종의 해리였을 것이다. 그러고 나니, 장애가 아닌 다른 것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도록 해야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공부를 못해서 교사를 못하는 것이 아니야?’


                                                            ‘네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야?’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이런 말을 듣는다면 너무 수치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팔의 장애 말고 다른 장애물을 하나씩 없애보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공부를 했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중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내내 나는 ‘놀고 싶다’라는 개념을 지워버렸다. 공부와 잠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랐고, 시간을 보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하지만 후회는 없는 그런 학창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꿈을 포기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꿈도 중등학교 교사다. 아니, 이미 교사지만, 교사가 아닌 그런 신분. 병 휴직자에서 제대로 교사를 해보는 것이 당장의 목표다. 이렇게만 듣는다면 임용고시생들이 보기에 나는 배부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다. 다른 꿈도 꿀 수 있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해보지 않아도 나는 교사를 오래 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험에 합격하고 무슨 걱정이냐고 묻겠지만, 내 걱정은 교사가 된 다음부터다. 교사가 된 이후, 내가 교사의 업무를 물리적으로/심리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된 처음은 대학생 때다. 학교에서 하는 면학 근로에서조차도 내 왼손은 버티지 못했다. 그저 손걸레로 책상을 닦고, 사무실을 빗자루질 하는 정도의 일을, 그 15분을 3개월 하고 나니 손목에 무리가 왔다. 병원에서 들은 처방은 휴식뿐이라고 했다. 그 당시 느꼈던 통증보다 훨씬 많이 좌절했다. 교사가 되면 분명 이것보다는 더 많은 일을 할 텐데,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좌절의 끝에서 그래도 해보고 고민하자고 생각했다. 해보지도 않고 무너지는 건 더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 오기로 대학 생활을 버텼다. 오기를 부려서였을까? 작년 이후 지금도 여전히 원인불명의 통증으로 엄지손가락은 일상생활에서 배제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시험에 붙고도 시작도 전에 아파서 쉬어야 하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왼손도, 오른손도 이제는 내 통제권 밖에 있다는 생각이 결국 병 휴직을 쓰게 만들었다.             


꿈이 있었으나, 꿈을 더 빨리 포기해야 하는 삶은 장애인들에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어디가 아프고 불편하다는 것은 그것을 메꾸기 위해 다른 곳들도 쉽게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이라서.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닌 장애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것은 장애를, 장애를 가진 나를 탓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아갈 힘도 빼앗아버린다. 나아질 가능성이 사라졌으니까.            



사람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는데,
상처 입은 나는 무엇도 이기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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