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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May 01. 2024

초대장을 수락하겠습니까?

알아채지 못한 안전함의 첫 경험

"안녕하세요?"


이 말의 끝은 분명 거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통화의 끝은 상담 날짜를 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것이 거절을 시도로 바뀌게 했을까? 후에 궁금하여 D양에게 물어보았다. 단순히 얼굴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D양이라면 믿을 수 있겠다'는 그 말이 마음을 움직여서라고 하였지만 나는 전혀 이해가지 않았다. 사람의 인연은 소중하지만 스쳐 지나간다. 이 정도는 충분히 스쳐 지나가도 되는 순간이니까, 모두가 그러니까. 모두가 나에게 항상 그랬으니까. 이것들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나에게는.


D양에게 연락을 한 것이 지금 돌이켜 보면 신기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살려고, 살고 싶어서 발악한 것일까? 지금 그 목소리를 들어보면 참, 씁쓸하면서 애처롭다. 발악을 하다 지치고 지쳐나가 떨어진 목소리 같기에. 나라도 들어줘야 할 것 같은 목소리지만, 나라서 못 들을 것 같은 목소리다.          


그렇게 나는 첫 상담을 하였고, 계속 나는 상담을 하고 있다.  


전화를 끊고 시간이 흘러 첫 상담은 대면으로 잡았다. 비대면 상담으로 신청하였지만 시간이 생겼다. 아니 만들었다. 만나보고 싶었다. 처음 마주한 그 상담실이 마음에 들었다. 이상하게 아늑했다. 아늑함이라는 것은 책에서만 있던 단어였는데 이상했다. 낯선데 편한 것도, 긴장되는데 불안하지 않은 것도 모든 게 이상했다. 단순히 소파가, 자리가 주는 아늑함이라기보단 그 공간과 분위기가 주는 그런 아늑함.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에서 나는 정말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나에게 있었던 일을 기계처럼 내뱉었다. 아무런 기억 없이, 감정 없이. 어서 다 출력하고 끝내고 싶었다. 그 일들을. 하지만 너무 많아서,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첫 상담부터 시간은 오버되었다. 50분의 시간은 거의 2시간이 되는 시간으로.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시간이 오버된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 느껴도 50분의 길이는 아니었다. 나는 시간을 계속 확인한다. 이상한 습관이 되어버렸는데, 자주 확인한다. 하지만 상담 때는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다. 시계는 내담자를 향해있지 않기에. 지났을 거라 예상했지만, D양이 아무 말을 하지 않기에 나도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2시간이나 지났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까지 시간을 쓰는 상담사는 없었으니까. 내 시간감각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기억나는 생각은 이것뿐이다. '왜 오래 안 앉아있었을 텐데 허리가 아프지?' 끝날 때쯤 눈을 돌려 시계를 보고, 시간을 보니 많이, 너무 많이 흘렀다.  D양에게는 미안하였지만 사실 좋았다. 시간을 내게 더 허락해 줘서. 나에게 상담 시간은 그런 의미이다. 다른 표현보다도 나를 더 수용해 준다는 의미. 같이 있어주는 것. 제일 중요한 것. 어쩌면 거기서 내 마음의 빗장은 단번에 열렸던 것일까? 내가 도움을 요청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몸이 느꼈던 걸까? 어쩌면 이 외롭고 괴롭기만 한 나의 삶에 D양을 초대해도 초대장을 찢어버리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초대했다.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D양은 안심하고, 안전하고, 상처를 받더라도 약을 발라줄 사람이었다.


분명 남인데 나만큼이나 나와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첫 상담이 제일 아쉬운 상담이다. 차라리 아프다고, 힘들다고 그 말만 했어도, 그 감정을 느꼈어도 설명하지 않아도, 설득하려 하지 않아도 나는 수용 받았을 거다. D양은 인정해 주었을 것이다.


"왜 힘들어요?"라는 설명을 원하는 말이 아니라 "무슨 일 있었어요? 물론 아무 일이 없었어도 돼요."라는 걱정 어린 따뜻한 말을 건네줬을 것이기에. 그걸 이제 알아버린 나는 그날의 시간이 조금 아깝다. 하지만 후회만 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에 좀 더 나를 표현하고, 용기 내고, 마주할 것이다.


더 이상 그럴듯한 말을 쓰고 싶지 않다. 경험하지 못했지만, 누군가는 내게 해주길 바라는 글을 적고 싶지 않다. 정말 모두에게서 익명이 된다면 솔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마주 보고 대화하는 말이 아닌 컴퓨터 화면의 글을 적기 시작했다. 안 괜찮다고, 아프고, 힘들다고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아서. 내가 나에게 못해주는 그런 따뜻한 말들은 나를 더 차갑게 만들었다. 그렇게 얼어붙은 나는 녹는 것보다 깨지는 것이 쉬운 사람이 되니까. 그만 부서지고 싶어서 나는 내가 녹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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