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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유진

네 잘못이 아니야

by 작은꽃
유선이와 유미가 엄마 품에 안겨 젖 먹는 모습을 얼마나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던가. 하지만 나 역시 그 애들처럼 이 젖에 매달려 엄마의 사랑을 파먹었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도 분명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는 작은 아기였을 것이다. 277쪽




이금이 지음. 이금이작가의 책을 처음 읽었다.


성까지 같은 두 '이유진'은 중학교 2학년 교실에서 재회한다. 둘은 키 번호에 따라 큰유진이와 작은유진이로 불린다. 큰유진이는 작은유진이를 기억하지만 작은유진은 큰유진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둘은 같은 유치원에 다녔고 모두 '그 큰 사건'을 겪었는데 말이다.


그 사건은 시간이 한참 흘러 중학생이 된 유진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특히 작은유진은 그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가족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작은유진은 자신의 부모가 새엄마, 새아빠라고 생각할 만큼 이미 몹시 외로웠었다. 두 유진과 친구 소라는 아픈 기억을 함께 찾고 치유해 간다.


유치원 때 '그 일'이라고 했을 때 성폭력 사건일 거라 짐작했다. 여자아이들이 겪은 딱히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성폭력일 것이다. 성폭력은 동서고금노소를 막론하고 일어나는구나. 무기력해지는 이유다.


성폭력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대단히 큰일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로는 훨씬 많이 발생할 것이다. 다들 말을 않고 쉬쉬 해서 그렇지 성추행 같은 일은 직장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그런데 그 일(성추행)이 있을 때, 누군가 그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내려할 때, 목격자나 당사자 마저 모른 척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제 막 새내기 교사가 되어 내 일을 도와주는 선배교사에게 뭐라고 당차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할 말은 한다고 생각했던 나인데도.


겉에서 보는 사람들은 '여태껏 가만히 있다가 왜 지금 얘기해?', '그러니까 여자애가 왜 지하철에서 술 먹고 잠을 자!', '성폭행 아니고 불륜이야', '여자애들이 짧은 치마 입고 다니니까 그렇지' 등 피해자를 탓하기도 한다.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또 한 무리는 겉으로는 피해자 편에서 지식인인양 나서지만 속으로는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기도 한다. 건우엄마처럼. 건우엄마가 TV에 나오고 자기 일처럼 나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상했다. 이 분도 겉 다르고 속 다른 분이겠구나. 대중에게 존경받는 이미지로 앞에 자주 나서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앞뒤 맥락을 살피거나, 관련 기사를 몇 개라도 읽어보거나, 피해자에 대한 책 한 번 훑어보지 않고 가해자 편에 서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편리하게 가해자 또는 권력자의 편에 서서 '내 일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다. 나한테는 그런 일이 없었어, 나는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았는데?. 이 역시 다 들어본 말이다. 내가 겪지 않았다고 안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내가 독감에 걸려본 적이 없다고 독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기억나지 않는다고 없었던 일이 아닌 것처럼.


두 유진이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부모님의 사랑과 만병의 약이라는 시간도 치유하지 못하는 그들의 상처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일과 그로 인한 2차 피해는 우리 모두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두 유진의 부모님들이 보였던 숨기고 싶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 쫓아가서 어떻게든 벌주고 싶은 마음 또한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한숨이 나오기도 했지만 꿋꿋하게 견뎌내는 두 유진을 응원했다.


유치원 때의 사건이 앞으로 내 인생에 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지만 나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아니, 상처받더라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 게 생긴 것 같았다. 이번 경우처럼 말이다. 256쪽





그래, 시작은 누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자신을 만드는 건 자기 자신이지. 살면서 받는 상처나 고통 같은 것을 자기 삶의 훈장으로 만드는가 누덕누덕 기운 자국으로 만드는가는 자신의 선택인 것 같아. 195쪽


건우엄마가 했다는 말을 할 때 작은유진이는 내 손을 꽉 잡았었다. 그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엄마의 분노보다도 소라가 껴안아 줬을 때보다도 진정으로 위로 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 아이는 또 다른 나인 것만 같았다. 241쪽


내 마음이 수시로 숱하게 변하는 것처럼 어른들도 그럴 것이다. 때로는 구름이 하늘을 가리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빛나고 있는 태양이 있음을 의심치 않듯이 엄마 아빠 가슴속에 있는 나에 대한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느끼기 때문이다. 256쪽


한마디, 한마디가 내 안에서 나갈 때마다 가슴에 박혀 있던 못이 빠져 나가는 것처럼 시원하면서도 격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 못은 엄마에게로 날아가 박혔다. 엄마의 눈이 사라졌다. 그 자리엔 어둡고 퀭한 공간만 남았다. 코도 사라졌다. 숨을 쉬었을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입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들이 옥수수알갱이처럼 우수수 쏟아질 것 같았다. 270쪽


엄마에게서 떨어진 나는, 이겼으면서도 눈두덩이가 찢어져 바닥에 누운 상대편을 볼 수 없고, 입이 부어 터져 승리의 기쁨을 말할 수 없는 권투선수 같은 기분이 돼 간신히 방으로 들어왔다. 271쪽


그랬어도 운명은 내게 큰유진이를 보내 내가 그 일을 알게 만들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때로는 상처가 덧나 아프고 힘들더라도 내가 기억하면서 아물게 하는 편이 나았다. 275쪽


자신들 앞에 벌어진 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기댈 곳을 찾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부모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거대한 벽 같기만 하던 엄마 아빠가 실은 평범하고 나약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맥이 빠졌다.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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