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원어민 강사 지원 업무_기억에 남는 업무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교사들이 떠안는 수업과 생활지도 외 업무가 상당하다. 여느 직장인처럼 교사도 직장에서의 일이라면 '하기 싫다'는 기분이 먼저 들것이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분명히 있다. 업무가 과중하지 않다면 그 일을 통해 업무체계를 익히고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내가 맡았던 업무 중에서 기억에 남는 업무 한 가지를 얘기해 보겠다.
‘영어 원어민 강사 채용과 업무지원’이다. 아직도 웃으며 말하는 에피소드를 많이 만들어준 일이다. 약 14년 전 3년 동안 영어 관련 업무를 맡았다. 영어교육 예산 집행, 영어 말하기 대회, 영어 골든벨 대회, 영어회화강사 채용 및 협력수업 등이 주된 일이었다. 이러한 일들 중에서 나를 ‘어나더레벨’로 만들어 준 것은 단연 영어 원어민 강사(이하 원어민) 관련 업무였다.
원어민과 함께 영어수업을 하고 원어민 지원 업무를 맡으면 영어를 자주 쓰고 잘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내심 노리고 있던 일이었다. 운 좋게 나는 그 일을 맡았다. 처음 영어교육 업무를 하던 해, 미국 뉴저지에서 온 20대 중반의 백인 여자가 우리 학교에 원어민 강사로 오게 되었다. 이름은 제시카. 그녀가 오기 전에 이력서와 영문 계약서를 살펴봤다. 영어는 간단한 회화만 할 줄 알았지 유창하지 않은 나는 그때부터 긴장을 하게 되었다. 영문 계약서와 이력서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시카를 처음 만난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작은 얼굴, 커다란 눈에 초록색 눈동자. 서양인을 처음 본 조선 말기 사람처럼 나는 겁이 났다. 안 그런 척했지만 속으로 떨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두렵게 한 것은 제시카의 말이었다. 말이 너무 빨랐다. 솔직히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시트콤에서 보면 옆에서 누가 말을 하는 데 듣는 사람 한쪽 귀로 글자가 들어가고, 다른 한쪽 귀로 들어갔던 글자가 그대로 나오는 장면이 있다. 듣는 사람의 표정은 멍하다. 내가 바로 그랬었다. 미리 봤던 그녀의 이력서와 가끔 들리는 아는 단어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유추할 뿐이었다.
처음 만나서부터 몇 달 동안 나는 그의 개인비서가 되었다. 그녀의 비자와 여권, 취업 서류를 위해 구청은 물론이고 경찰서 형사과도 가보았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제시카가 살 집을 구하러 다녔다. 부동산 사장님, 영어교육 전임자, 나 셋이서 몇 군데 집을 미리 둘러보았다. 월세, 깨끗한 정도, 학교와의 거리 등을 기준으로 괜찮은 집 서너 곳을 추렸다. 그 후 제시카와 함께 추려진 후보군에 직접 가보고 그가 원하는 집을 정했다. 살 집에 들어갈 일부 물품도 구비해 주었다. 그의 짐도 내 차로 날라주었다. 좁은 골목까지 차를 가지고 들어가 주차하고 짐을 꺼내고 올려주었다. 그렇게 몇 번 짐을 날라주었는데 좁은 골목에서 주차하는 것이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그때부터 짜증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제시카의 수업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수업 외적인 면이었다. 어느 날 아침 제시카가 절뚝거리면서 출근했다. 몇 주 동안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한국에 있는 다른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여기저기 자주 놀러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다 밤늦게 술을 먹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넘어진 것이다. 병원은 갔다 왔냐고 물었더니 돈이 없어서 못 갔다고 했다. 평소에 김밥은 자주 사 먹던데 병원 갈 돈이 없다니……. 제시카는 대출받은 학자금을 갚아야 해서 돈이 없다는 말을 그 후에도 내내 달고 다녔다. 내가 돈 빌려줄 테니까 같이 병원에 가자고 했다. 나는 공강시간에 그를 내 차에 태우고 정형외과에 갔다. 제시카가 한국말을 못 하니 의사의 말을 내가 제시카에게 영어로 통역해야 했다. 자신이 없어서 의사 선생님에게 “선생님 영어 잘하시죠?”라고 하니 의사는 즉각 이렇게 말했다. “저 영어 못해요. 선생님이 하세요.” 아……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 하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제시카 하녀노릇을 하는 것이 더 싫었다. 내가 술 먹고 넘어진 애 데리고 내 돈까지 내가면서 (제시카한테서 돈 받을 생각도 없었고, 그가 갚을 돈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병원까지 왔으면 됐지 뭘 더 해야 하나.
웃기면서도 신기한 것은 그때 병원에서 내가 영어를 상당히 유창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짜증이 나서 그냥 되는 데로 아무렇게나 영어로 말했다. 그런데 영어가 그럭저럭, 아니 술술 나왔다. 이후로 제시카와 종종 다투기도 했는데 그때도 영어가 막힘없이 나와서 말하면서도 스스로 놀라곤 했다. 내가 영어를 이렇게 잘했었나? 사람들이 술 먹으면 영어를 잘하게 된다고 하는 원리와 같았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나도 모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말을 하니 영어가 잘 됐다. 병원에서는 짜증이 나서, 제시카랑 싸울 때는 내가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주변 신경 안 쓰고 말했었다. 내가 제시카랑 싸우는 것을 몇몇 선생님들이 지나가면서 봤는데 이때 '승희쌤 영어 잘한다'는 소문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의 다리가 나을 때까지 병원에 같이 가주고, 괜찮냐고 물어봐주고, 의료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는지 여기저기 알아봐 주었다.
제시카는 한국어는 배우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김밥 천국 메뉴는 외우고 있었다. 지금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지만 은근히 우리나라에 대해 비하하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자기 남자 친구 얘기할 때만 싱글벙글하고 평소에는 웃지도 않고 무표정했다. 수업 준비는 제대로 안 하면서 주말에 이태원에서 놀 궁리만 하는 것 같아 속이 끓었다. 그 밖에 냉장고 고장 났다고 휴일에 전화하고 자기 집 문이 안 열린다고 밤에 전화하고, 집주인아저씨가 전화 안 받는다고 전화하고 나를 무척 귀찮게 했다. 사소한 문제 다 해결해 주고 휴일에 오는 전화까지 다 받아주었는데 제시카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안 하는 것 같았다. 제시카가 다른 영어선생님과 친해지면서 내 흉을 보는 것을 몇 다리 건너 듣기도 했다.
어느 날은 제시카가 미국에 있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며 운 적이 있다. 남자친구와 결혼을 약속했었는데 이제 다 끝이라며 울어서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며칠 뒤 남자친구와 다시 만나기로 했다며 활짝 웃었다. 잘 됐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얘는 감정기복이 심한 건지 진중하지 못한 건지 특이하네'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내가 <파라노말 액티비티>라는 미국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공포영화를 봤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무서운 짓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 주인공이 행방불명되었다고 나온다. 혹시……얘가 그 행방불명 됐다는 여자 주인공 아니야?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후 나는 그녀를 대하는 것이 불편한 것을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어쩌면 나는 제노포비아 xenophobia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초록색 눈동자의 깊은 눈, 가늘고 긴 코, 하얀 피부와 노란 머리, 빠른 말에 나 역시 제대로 적응을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이런저런 요구와 나와 맞지 않는 면면들로 인해 속으로 화가 많이 났었다. '나는 네가 못마땅하다'는 표현을 종종 하기도 했다. 속으로 혼자 ‘고백투유어컨트리’를 백번은 외쳤다. 그때는 그녀가 그저 짜증 나고 귀찮은 존재였는데 이제와 돌아보니 나도 문제였던 것 같다. 수업 중에 애들 앞에서 제시카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선생님들이 나 영어 잘하는 줄 아는데 실은 못한다는 거 들통나면 어쩌나, 제시카가 나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말을 빨리 하는 건가, 이런 생각에 지나치게 긴장했었던 것 같다. 한국을 비하하는 말을 한다는 것도 어쩌면 나의 기분 탓이었을지 모른다. 영어도, 외국인도 익숙하지 않은 나는 조금 불안했던 것 같다.
제시카도 낯선 나라에 혼자 와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이도 나보다 4살 정도 어렸다. 무엇보다 그런 그를 돕는 일이 내 일이었다. 내 일을 하면서 나는 프로답지 못했다. 내가 왜 얘 시중을 들어야 하냐고 불평만 했다. 무리한 요구를 해오면 적당히 무시하거나 관리자에게 가서 고충을 토로해도 됐었다. 제시카는 그때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이랬을지도 모른다. ‘쟤는 영어도 못 하면서 왜 나한테 매일 잔소리만 하지?’
원어민으로 인해 힘들기도 했지만 원어민 강사로 인해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제시카 다음으로 온 원어민 강사는 호주에서 온 키 크고 덩치도 컸던 라이언. 영어권 나라에서 20대 중‧후반 젊은이들이 경험도 쌓고 돈도 벌기 위해 한국에 원어민 교사로 많이 오는 것 같았다.
라이언의 생활이나 비자, 급여에 관한 일은 다른 선생님이 맡았지만 수업은 나와 제일 많이 했다. 그는 나와 함께 5, 6학년 영어를 가르쳤다. 라이언은 말을 그렇게 빨리 하지는 않았지만 강한 호주 엑센트를 쓰고 있어서 그의 말을 알아듣는 것 역시 매우 힘들었다. 사실 이건 다 핑계고 내가 그냥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영어 잘하는 사람은 말이 빠르든, 느리든, 엑센트가 호주든, 영국이든, 인도든, 필리핀이든 다 잘만 알아듣는다. 같은 연구실을 썼던 선생님들은 라이언의 말을 다 잘 이해하는데 나만 못 알아듣는 것 같아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그럭저럭 적응하긴 했지만 ‘역시 이번 생에 영어는 틀렸나’싶어 마음이 쓰렸다.
라이언은 남자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냈고 심지어 교장선생님과 술도 마시는 사이였다. 유쾌하고 만사 여유 있는 성격 덕분에 나도 라이언과 있으면 불편함이 없었다. 나뿐 아니라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이 라이언을 좋아했다. 수업 준비도 열심히 하고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키는 185cm가 넘었고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커서 함께 수업에 들어가면 그 존재감만으로 아이들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무렵 작은 이벤트를 준비했다. 그것은 라이언이 산타복장을 하고 수업 도중에 뒷문에서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거구였던 라이언에게 맞는 산타 옷이 없어서 약간 타이트한 산타복장을 입긴 했지만 라이언은 정말 산타할아버지 같았다. 그때 사진을 많이 찍어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직도 아쉽다.
라이언은 한국에서 2년 조금 넘게 살았고 한국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우리 학교에 온 지 2년째 되던 해 한국에서 결혼식을 했다. 그때 호주에 있던 라이언의 가족이 모두 한국에 왔다. 어머니, 아버지, 누나, 매형, 여동생 다섯 명이 우리 학교에도 방문했다. 고맙게도 다섯 분이 이틀 동안 우리 학교 수업에 함께 들어와 주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3, 4학년으로, 누나, 매형, 여동생은 5, 6학년으로 나와 함께 수업에 들어갔다. 라이언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고 선생님들과 학교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라이언은 그 수업을 위해 미리 알아서 준비까지 해왔다. 오전에 수업이 4시간이었는데 연속 이틀 동안 4시간 수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차 적응도 안 됐을 피곤한 상태에서 라이언의 가족은 매 시간 웃으며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을 함께 했다.
라이언이 아이들에게 가족의 이름, 라이언과의 관계, 사는 곳, 하는 일 등을 퀴즈를 통해 소개했다. 예를 들면 라이언 가족이 한국에 와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은? (정답 씨앗호떡), 한국에 와서 가본 곳은? (경복궁) 매형의 직업은? (엔지니어이자 연구원. 에너지 연구하는 회사에 다녔고 우리나라 기업 한화와 협업하는 일도 한다고 했다) 아이들도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각 반에서 나오는 질문 중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Do you know 강남스타일?” 당시에는 싸이가 세계를 휩쓸고 간 지 1년 정도 후였는데 라이언의 가족과 아이들은 강남 스타일로 하나가 되어 말춤을 추기도 했다. 그때 함께 했던 시간은 아이들과 라이언의 가족, 나에게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뜻깊은 추억이 되었다. 라이언과 그 가족은 정말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라이언은 지금 호주에서 아이 둘 낳고 잘 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