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
요즘 다니는 학교는 출근할 때 버스를 타고 간다. 퇴근할 때는 걷거나 버스를 타거나 같은 동네 사는 옆 반 선생님 차를 얻어 탄다. 출근을 위해 집에서 나오기 전 버스도착을 알려주는 앱을 보고 집에서 카운트다운을 센다. 버스가 자주 오기는 하지만 뒤에 오는 버스일수록 사람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 집에서 일찍 나선다. 사람이 꽉 찬 버스는 스트레스지만 헐렁한 버스는 쾌적할 뿐 아니라 짧은 버스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시간 여유가 있거나 음식물 쓰레기가 꽉 찬 날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가지고 나가 버스정류장 가기 전에 버린다.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나가 버리는 것은 귀찮고 안 하고 싶은 일이지만 막상 통 안에 쓰레기가 툭 떨어지면 기분이 나쁘지 않다.
현재 근무하는 학교로 옮긴 후 출퇴근 하면서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상황과 풍경을 접하게 되었다. 일단 버스를 타는 것 자체가 그렇다. 발령 18년 차인데 버스로 출퇴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버스로 다니면 사람 구경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버스를 일정한 시간에 타면 낯이 익는 사람들이 생긴다. 같은 버스를 탔던 키 크고 잘 생긴 고등학생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전학 갔는지, 이사 갔는지 궁금하다. 30대 여성 직장인, 40대 직장인으로 보이는 아저씨, 취준생으로 추정되는 20대들, 임산부석에 앉은 할아버지와 어깨 떡 벌어진 청년, 거울 보며 화장하는 고등학생, 부모님은 키가 얼마나 되실까 궁금해지는 키 190cm는 되어 보이는 남학생을 버스에서 만난다.
버스를 타는 것은 여러모로 좋다. 나는 장거리 운전은 좋아하지만 가까운 곳을 운전해 다니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버스는 딱 맞는 교통수단이다. 퇴근길은 몰라도 아침에 걸어가기는 조금 부담스러운데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내릴 수 있어 편리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동에서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쳐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학교 교실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거리도 역시 5분이 안 된다. 주차할 필요도 없고 기름 값도 안 든다. 버스비를 내긴 하지만 비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요즘은 K패스를 이용해서 환급도 받는다. 버스를 타고 내리면서 카드 찍을 때 들리는 ‘띡’ 소리도 나는 무척 좋아한다.
퇴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가능하면 최대한 걸으려고 한다. 날이 너무 덥거나 들어야 할 무거운 짐이 있는 날에는 자차를 운전해 오가는 날도 있다. 걷지 않으면 버스를 타거나 옆 반 선생님 차를 얻어 타고 집에 간다. 옆 고등학교 하교 시간과 내 퇴근 시간이 겹치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학생들로 꽉 찬다. 학생 무리와 만나지 않기 위해 옆 고등학교 하교 시간에 퇴근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디든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지만 꽉 찬 버스는 정말 싫다. 버스 안으로 발을 들이는 것도, 타고 가는 중에도, 내릴 때도 불편하고 불안하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날에는 역시 버스도착을 알려주는 앱을 보면서 퇴근 준비를 한다.
옆 반 선생님 차를 타고 갈 때는 잠깐이지만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학교, 반 아이들, 내 아이들, 건강, 남편, 부동산, 아이 교육 등 이야기할 주제는 넘친다. 할 얘기는 많은데 금방 도착해 버려서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쯤 내려야 한다. 옆 반 선생님 차를 타고 오면 집까지 15분 정도 걷게 되는데 종종 중간에 마트에 들른다. 마트는 일단 가면 돈을 많이 쓰기 때문에 안 가는 게 좋지만 퇴근길 마트는 참새의 방앗간 같은 곳이다.
아주 피곤하거나, 아주 덥거나, 들고 갈 짐이 많거나, 비가 세차게 오는 날 빼고는 걷기 운동도 할 겸 걸어간다. 걸으면서 기분도 좋아지기 때문에 봄, 가을에는 최대한 걸어서 집에 간다. 걸어서 퇴근할 때는 몇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선크림을 바르고 선글라스를 쓰고 이어버즈를 낀다. 날이 추워지면 커다란 헤드폰을 쓰는데 소리도 좋고 귀마개 역할도 해서 일석이조다. 유튜브 오프라인 저장된 영상 목록 중에 뭘 들을까 고르기 위해 화면을 밀어 올린다. 나는 주로 부동산, 역사, 건강, 법률을 주제로 한 영상을 듣는다. 평소에 듣고 싶었던 30분 이상의 긴 유튜브를 들으며 맑은 날 걸을 때는 런던의 하이드파크, 뉴욕의 센트럴파크 산책이 부럽지 않다. 런던의 하이드파크는 20년 전에 몇 시간 가보았고,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못 가봤다. 가방이 무겁거나 날이 더운 날은 ‘여기가 산티아고 순례길이구나’ 하면서 걷는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상상 속에서만 가보았다.
걸어서 퇴근하는 길에는 내가 씩씩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고단한 일과를 마무리하고 이렇게 걸어가는 나를 토닥토닥해주고 싶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좋은 것은 차곡차곡 쌓이고 안 좋은 것은 툴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다. 학교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언짢은 일들이 멀어지는 학교와 함께 조금씩 사라진다. 물론 집에 와서까지 곱씹는 날도 많지만. 하루에 만보는 걸어야 건강에 좋다는 데 퇴근길에 집에 걸어가면 얼추 만보를 맞출 수 있다. 학교에서 4,5천 보 걷는 날에는 만보가 훨씬 넘어간다. 내가 이렇게 두 눈으로 보고 두 다리로 걷고 집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과 행복감을 느낀다.
걸으면서 길가에 가게들을 들여다본다. 어느 날은 부동산창에 적힌 시세를 유심히 보고 어느 날은 비싼 김밥 집의 김밥 종류와 가격을 찬찬히 본다. 저 아파트를 사려면 대출을 얼마 받아야 하나, 대출받으면 이자는 얼마인가, 그럼 월급에서 얼마를 내야 하는가, 저 김밥은 왜 저렇게 비쌀까, 더 맛있나? 비싼 재료가 들어가나? 다음 달 월급날 퇴근길에 사갈까? 하고 속으로 계산해 본다. 집에 가는 길에 어쩌다 한 번씩 편의점에 들른다. 과자나 초콜릿 같은 것을 사서 메고 있던 가방에 넣어두고 다음날 학교에서 지칠 때 먹는다. 종종 요구르트 아주머니를 만나기도 한다. 우리 동네에서 영업하시는 분인데 그분도 일과를 마치고 요구르트 대리점으로 퇴근하는 길이다. 친절한 요구르트 아주머니와 반갑게 인사하고 마시는 요구르트와 떠먹는 요구르트를 사서 백팩에 넣는다. 요구르트 한 보따리가 조금 무겁기는 하지만 발걸음은 가볍다. 일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딸기 맛 요구르트를 살 수 있으니까.
학교가 멀어 차를 운전해서 가야 할 때는 출퇴근하는 차 안에서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이 좋다. 라디오나 유튜브 영상을 다운로드하여 듣거나 아무것도 듣지 않고 그저 멍하게 운전만 하는 것도 좋다. 평소에 먹고 싶었던 달달한 커피유음료나 한 입에 쏙 들어가는 과자를 차 안에서 먹기도 한다. 혼자 차 안에 있을 때는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아서 마음이 편하다. 유일하게 완전히 혼자 있는 금쪽같은 시간이다. 근무지가 가까운 것도 좋지만 조금 먼 것도 괜찮다. 퇴근길에 이렇게 사소한 재미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행이지 여행이 별 건가! 특별히 돈 많이 주고 유명한 곳을 가거나 다른 나라 갈 필요가 없다. 매일 조금씩 다른 길로 가고 다른 가게를 구경하는 것이 여행이 아닌가 한다. 작은 꽃을 들여다보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 봄에는 벚꽃길을 걷고 가을에는 은행나무 사이를 걷는 것, 여름에는 초록 잎들이 무성한 나무 그늘을 걷고 겨울에는 찬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 차 안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 옆 반 선생님과 짧은 수다를 나누는 것, 마트에 들러 1+1 초코우유를 사 먹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긴장을 풀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이다. 걸으며 일터에서 돌아오는 길이 나에게는 작은 여행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