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갈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 Feb 13. 2024

영화, <비포 선셋>

79분의 다정한 대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나나 너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있다고 생각해. 이 세상에 마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는 시도 안에 존재할 거야.





연말이 되면 관계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곤 한다. 지난 일 년간 맺어온 수많은 관계 속에서 의미 있는 만남과 대화를 헤아려보게 되고, 어느 순간 공허한 마음을 맞닥뜨리게 된다. 지난 연말, 어김없이 찾아온 마음의 공허함을 달래고자 영화 <비포 선셋>을 보았다. 4년 전에 <비포 선라이즈>를 봤던 것 같은데, 주인공들의 시간은 그보다 더 긴 세월이 흘러있었다.

파리에서 다시 시작된 이들의 대화. 그 대화는 그간의 긴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따뜻하다. 마치 첫 만남 때처럼 우리는 자연스레 그들의 발걸음에 맞춰, 셰익스피어 서점에서부터 셀린의 집까지 낭만적인 파리의 풍경 속을 함께 걷게 된다.





79분. 영화 속 주인공과 관람객에게 주어진 시간은 평등하다. 우리는 공백 없는 그 시간 속에 온전히 몰입하며, 솔직하고 밀도 높은 대화가 주는 기쁨과 위로를 함께 경험한다. 각자의 기억 속 제시와 셀린을 소환하여 당신이 많이 그리웠다고, 시간의 공백 속에서도 당신과의 관계는 언제나 나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이별의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관계를 가로막는 현실들은 고개를 내민다. 서로에 대한 진심과는 별개로 이미 아내와 아이가 있는 제시, 남자친구가 있는 셀린. 이들의 낭만적 관계가 불편한 관계로 인식되며 그어지는 분명한 선. 고백하자면, 이들이 그 선을 넘어버릴까 조마조마하며 후반부를 보았다. 모든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낭만적인 만남과 현실 사이의 낙차가 클수록 허무한 감정의 크기도 커진다.





이들의 만남이 끝나갈 무렵, 그런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한 깜짝 선물이 우릴 기다린다. 셀린이 불러주는 그녀의 자작곡 <A Waltz For A Night>은 두 사람의 짧은 만남, 그리고 긴 그리움의 시간을 담백하지만 아름답게 담아낸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음악으로 사랑에 빠졌던 그들이, 파리에서는 음악으로 이별한다. 긴 세월이 흐르며 그들의 젊음은 사라진듯 보이지만, 셀린의 노랫말과 함께 주고받는 그들의 애정어린 눈빛은 9년 전 청음실에서의 눈빛​ 그대로 순수하고 아름답다.





비포 시리즈를 보고 나면 늘 ‘좋은 대화’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어색함이나 강박, 편견 없이 온전히 상대에게 몰입하고, 나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화. 서로가 서로에게 무장해제되는 순수한 만남. 많은 이들에게 이 시리즈가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갈증을 느끼고, 일상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낀다를 걸 보여주는 건 아닐까. 마지막 시리즈인 <비포 미드나잇>은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완성 지을까. 궁금하면서도 아끼고 싶은 마음에 기약 없는 만남을 약속하며 글을 마무리 지어본다.



함께 있으면서 고독한 것보단 나아.


매거진의 이전글 유병욱, <평소의 발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