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시 바라본 일상에 반짝임이 있다
마음속 멘토들이 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기에 나의 존재조차 모를 이들이지만, 살을 맞대며 함께 시간을 보낸 그 어떤 선배들보다 내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존재들. 방향을 잃은 날이면 책 속의 문장을 통해 그들과 만났고, 그들의 시선을 빌려 눈앞의 고민과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얼마 전 읽은 책 <평소의 발견>의 저자이자 광고회사 TBWA의 Creative Director인 유병욱 작가님도 이처럼 문장을 통해 만나 뵙는, 마음속 멘토 중 한 분이시다.
문장을 쌓아두는 건, 저보다 더 깊이 생각하고
더 과감하고 더 매력적인 사람을 곁에 두는 것과 같았습니다.
작가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카피라이터 지망생이었던 한 친구를 통해서였다. TBWA의 '주니어보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작가님께 직접 멘토링을 받았던 친구는 어느 날 내게 작가님의 책을 추천해주었다. <생각의 기쁨>. 제목부터 묘한 끌림이 있었기에 곧장 읽어봤는데, 과연 반짝이는 시선과 밀도 높은 문장으로 가득했다. 아끼는 노트 위에 빼곡히 문장들을 옮겨적으며, 내가 속한 '광고업’을 바라보는 나만의 관점이 생겨나는 단단한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이 꽤 든든한 위로이기도 했기에 광고 일을 하며 불안과 회의를 느끼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어설픈 위로 대신, 작가님의 노란 책을 건네었던 기억이 있다.
유병욱 작가님의 두 번째 책 <평소의 발견>은 전작에 비해 조금 더 일상적인 시선이 묻어나는 느낌이다. 육아와 사랑, 추억, 독서, 그리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에겐 한없이 가볍게만 여겨질 일상의 단편들이 그의 시선을 만나 어느새 밀도 높은 문장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좋아서 읽은 책의 문장이 언젠가 내가 쓸 카피의 뼈대가 되는 삶. 내가 관찰한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어느 날 회의 시간의 쓸 만한 인사이트로 돌아오는 삶". 서문에 적힌, 그가 행복을 느낀다는 삶의 모습은 윤슬을 머금은 어느 바다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반짝이는 영감과 생명력으로 가득한 삶. 나도 그런 바다를 꿈꾼 적이 있지 않던가.
괜찮은 생각일까? 판단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시시하면 지워버리면 되죠.
하지만 애초에 붙잡지 못한 생각은 결코 돌아오지 않습니다.
작가님의 책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점은 평소 내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정제된 문장으로 표현 못했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작가님께서 선명히 표현해주신다는 점이었다. 이를 테면, 작가님과 나는 공통적으로 인터뷰 읽기를 좋아하는데 작가님께선 이를 두고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라 표현하셨다. 머리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의 인생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이기에, 그가 거인이 되기 때까지 거쳤을 긴 시간이 다듬어준 '명료하고 힘 있는 생각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장을 옮겨 적으며, 작가님의 책 또한 내게 든든한 거인의 어깨가 되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준생 시절에는 그의 어깨를 빌려 내가 광고업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생각의 기쁨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고된 업무로 힘들어하던 초년생 시절엔 그의 어깨를 빌려 직업의 자존을 기를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긴 요즘에는 또다시 그의 어깨를 빌려 내 하루의 밀도를 높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광고에서 보이는 글자를 보고 맞춤법을 배울 수도 있는걸요.
그게 제가 하는 ‘광고’라는 일에 대한 저의 직업적 자존입니다.
좋은 직업인이자 좋은 동료, 선배가 되기 위해 늘 관찰하고 수집하며, 기록하는 그의 일상. 이처럼 평소를 그저 흘려보내지 않는 삶의 태도는 누구에게나 비슷한 풍경을 전혀 다른 밀도의 기억으로 바꾸어 준다. 책을 덮으며, 서점에서 마주했던 어느 책의 제목을 마음속에 새겼다. <태도가 작품이 될 때>. 평소를 흘려보내지 않는 태도가 나에게도 좋은 인사이트, 아름다운 문장으로 찾아올 그 어떤 날을 꿈꿔본다.
인생의 보석들은, 평소의 시간들 틈에 박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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