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500일의 썸머, 비포 선라이즈, 플립
원래는 타임슬립에 이어 로맨스 장르를 파보려고 했다. 드라마 하나를 정해 다시 보는데 정신 차려 보니 지루하게 30초씩 앞으로 가는 버튼이나 누르고 있었다. 이건 아니지. 글을 쓰고 싶어 못 견딜만한 힘이 필요했다. 방황 끝에 내 인생 로맨스 영화들을 쭉 훑으며 무엇이 그리도 좋았는지 적어보기로 했다.
클래식
[주체할 수 없이 신나는 마음]
조승우가 손예진과 대화하며 나사 빠진 얼굴로 '예.. 예.. 예..' 할 때, 죽어라 뛰어 헥헥거리는 몰골로 가로등을 깜빡거릴 때. 멋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마음이 녹는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매끈하게 컨트롤하지 못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조급해서 엉망진창 실수를 하는 것도 괜찮다. 뚝뚝 떨어지는 진심이 있다면.
내 자존심, 겉치장에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당신에게 빠져버렸음을 다 드러내는 것이 로맨스의 포인트! 감정의 전염성은 너무 강해서 주인공이 행복해 실실거리면 별 감정 없던 시청자도 괜히 흐뭇해진다.
손예진의 경우 엄마보다는 딸 버전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역시 같은 이유인 것 같다. 조인성이 우산 일부러 버리고 갔다는 걸 깨닫고 세상 신나서 거의 눈물까지 고인 눈으로 활짝 웃으며 '언니 내 꺼 가져!' 하는 장면은 진짜... 보는 사람이 더 행복했다.
[시그니처 장면]
로맨스 영화마다 음악과 함께 힘을 준 시그니처 장면이 하나씩은 꼭 있다. 주로 포스터에 나오는 장면이긴 한데, 덕분에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영화와 더 친밀해질 수 있다. 늑대의 유혹은 강동원 우산 장면. 건축학개론은 양팔 벌리고 철도길 걷는 장면. 엽기적인 그녀는 높은 곳에서 ‘견우야~’하고 고백하는 장면. 라붐은 헤드폰 씌워주는 장면. 디카프리오판 로미오와 줄리엣은 수족관 너머로 눈이 마주치는 장면. 타이타닉은 뱃머리에서 팔 벌리는 장면. 비포 선라이즈는 좁은 방 안에서 남녀가 엇갈리며 서로를 힐끔거리는 장면(혹은 손전화 시늉하며 속마음을 고백하는 장면). 라라 랜드는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춤추는 장면. 노트북은 여자가 남자에게 매미처럼 매달려 키스하는 장면… 클래식 역시 옷 뒤집어쓰고 뛰어가는 장면이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겠다.
대체적으로 상대에게 반하기 시작하거나, 상대에 대한 마음을 깨닫거나, 오해가 풀려 사랑을 확인하는 등 심경의 변화가 클 때 탄생한다. 개인적으로는 화려하고 번쩍거리기보단 아주 디테일한 눈빛 변화나 손의 움직임 등에 집중해 숨죽이고 지켜보게 되는 장면이 더 기억에 많이 남았다. 상대적으로 드라마는 딱 한 장면만 꼽기가 힘들긴 하다. 그럼에도 김은숙 작가님은 상징적인 장면을 잘 쓰시는 것 같다.
[딸이 상상하는 엄마의 러브레터]
가족의 연애를 상상한다는 컨셉이 좋았다. 그게 엄마와 딸의 연결고리가 된 것도 좋았고. 나이가 들고 부모님을 한 인간으로 인식하면서부터 그들의 인생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그들에게도 찬란한 젊음이 있었다는 건 낯설면서도 신나는 일이다. 엄마나 아빠의 첫사랑은 평소에 잘 상상하지 않기 때문에 뭔가 친근하면서도 짜릿한 느낌을 준다. 시청자로서 ‘우리 엄마의 첫사랑은 어땠을까’ 상상해 볼 수 있어 공감대 형성도 잘 된 작품인 것 같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모르는 가족이 마음속 깊이 보관해둔 행복한 이야기, 좋다구!
500일의 썸머
[전혀 다른 세상을 가진 남녀]
로맨스 장르일수록 남녀의 철학이 펄떡펄떡 살아 숨 쉬어야 재미있다 (고집 말고).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은 톰과 썸머가 건축에 대해 이야기할 때다. 톰은 이 곳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스팟이라고, 몇 년도에 지어진 건물이고, 사람들이 더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 자기라면 어떻게 지었을 거다, 하면서 썸머 팔에 스케치도 그려준다. 접어둔 꿈인 건축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져서 너무 사랑스러운 장면이다. 현실에서 자기 생각이 분명한 사람들에게 끌리듯, 시청자도 철학이 분명한 캐릭터에게 매력을 느낀다.
[자기들만의 놀이]
로맨스에서 비밀 놀이만큼 설레는 게 없다. 이케아에서 소꿉놀이하는 것도, 진지하게 성인 비디오를 같이 보는 것도, ‘피너스’를 외치는 이상한 놀이마저도 그들이 푹 빠져서 즐거워하니 귀엽다. 그 덕에 헤어지고 먼 훗날 같은 장난을 시도했을 때 시청자도 함께 아련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같이 추억할 것이 있다는 건 힘이 세니까. 뭔가 다시 아름답게 보이고, 낯설면서도 은근히 친근감이 느껴지고. 쉽게 지워지지 않는 사람의 흔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치관이 정반대로 바뀐 두 남녀]
유독 수미상관을 좋아한다. 처음과 끝에 연결성이 있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톰은 운명론자, 썸머는 회의론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썸머는 톰과 헤어진 후 운명의 상대를 만나, 톰의 말이 맞았다는 걸 깨닫는다. 톰은 운명이라 믿었던 썸머와 헤어진 후에야 사랑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썸머의 말을 믿게 된다. 종잇장 뒤집듯 휙휙 바뀌는 사람 마음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게다가 진짜 재미난 관계 설정 아닌가? 헤어져야만 성장하는 커플의 사랑 이야기라니. 결론적으로 둘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사랑관을 바꾸게 되는 이야기라 훨씬 여운이 남았다.
톰이 배운 게 있다면 누구도 위대한 우주의 이치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연! 그것은 우주의 이치다. 그보다 위대한 건 없다. 톰은 기적은 없다는 걸 배웠다. 운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깨달았고 이제 확신이 생겼다.
비포 선라이즈
[낯선 공간이 주는 즉흥성과 짜릿함]
이 영화의 넘버원 장점이다. 제시는 이렇게 말한다.
좋아. 이런 식으로 생각해봐. 10년, 20년이 흘렀다 치자. 알았지? 그리고 넌 결혼을 했어. 그런데 결혼 생활이 옛날만큼 재미있지가 않아. 그래서 남편을 탓하며... 네가 옛날에 만난 모든 남자를 떠올리는 거야. 그때 그 남자를 선택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는 거지. 그 남자 중 하나가 바로 나야.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 이 시기로 돌아와 네가 놓친 게 뭔지 생각해봐. 놓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넌 물론이고 네 미래의 남편도 크게 감사하게 될지 누가 알겠어? 난 낙오자인 데다 의욕도 없고 따분한 놈이니 넌 올바른 선택을 한 거고... 따라서 행복한 거야!
여행지에서 만난 호감 가는 상대가 이렇게 부담 없이 데이트 신청을 하는데 거절할 사람이 있을까? (물론 무서울 수도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즉흥에 대한 동경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때 두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설렌다. 정해져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하는 기대. 걱정과 현실은 잠시 기차에 두고 낯선 남자를 따라 폴짝 뛰어내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오늘 할 일을 정하는,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무책임한 선택들을 영화를 통해 볼 수 있어서 몰입감이 높았다.
[사랑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솔직한 대답]
둘은 그냥 동행이 아니다. 서로 이성적 호감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함께 한다. 서로 캐주얼한 척하고는 있지만 물방울 하나만 아주 살짝 탁, 하고 튀면 바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긴장감이 감돈다. 그 간지러운 감정. 아마 <하트 시그널>이 재미있는 이유도 그렇지 않을까. 서로 어느 정도 호감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만 대놓고 말하지 않으니까. 자연스레 진실게임을 할 때도 사랑에 관한 질문을 주로 한다.
이때 두 캐릭터의 성격이 분명해서 더 짜릿하다. 그리고 그걸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인지, 상대를 향한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순순히 다 인정하고 말해준다. 상대방은 그 자체를 특별히 여기고 즐거워한다. 너무 분명한 탓에 서로 좋게 좋게 이야기하려고 하다가도 한 번씩 '무슨 뜻이야?' 하며 삐끗하는 때가 있다. 셀린은 현실을 알지만 낭만을 믿으려 하고 제시는 약간 시니컬하다고 해야 하나... 솔직함은 호감을 가져오고, 그 솔직함들이 부딪혀 튀는 스파크는 기분 좋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너를 사랑하고 싶은 한 가지 이유]
마음의 준비도 없이 별안간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영화 같은 하루가 끝나갈 무렵 서서히 현실을 생각한다. 장거리 연애하는 커플도 있다, 방학마다 서로 왔다 갔다 하면 될 거다, 절박하게 이런저런 방법들을 나열해보지만 공허할 뿐이다. 성숙한 둘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리 꿈같지 않다는 것을. 그리하여 오늘 밤을 멋지게 즐기기로 약속한다. 유한한 사랑이기에 더 애틋해지고 몰입하게 된다. 둘이 만나면 안 될 이유는 너무 많고, 만나야 할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좋아서. 그러나 이성은 감정을 이길 수 없어서 결국 둘은 마지막 기차 앞에서 참지 못하고 6개월 후에 만날 것을 약속한다. 믿을 수 없다 해도 믿고 싶은 약속.
플립
[성장 서사가 가장 자연스러운 청소년 캐릭터]
사실 누구나 인생이 혼란스럽지만 청소년을 다룬 이야기는 그 혼란을 유감없이 표출할 수 있어서 특히 공감을 많이 받는 것 같다. 로맨스, 범죄, 모험 어떤 장르를 다루더라도 가치관이 흔들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있다. 인간관계에 서툴러서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꼬여만 가는 상황들도 그렇고. 특히 청소년 로맨스의 경우 성장하는 속도가 달라 서로 좋아하는 타이밍이 엇갈리는 게 영화를 계속 보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동네 주민]
학교, 회사, 동호회, 여러 곳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지만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건 어쩐지 특별한 연대감을 준다. 나와 너의 비공식적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어색한 듯 내적 친근감이 확 높아진다. 동네 어른들과의 관계, 서로의 가족들과 맺는 관계도 다 입체적이어서 재밌었다.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뭉뚱그리지 않고 하나하나 살리면 여러 콤비가 나올 수 있는 잠재력이 된다.
사랑 이야기가 인기 있는 이유는 어른들 세계에서 드물게 순수해질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 아닐까? 사랑을 하려면 진심을 드러내야만 하니까. 머리로는 현실을 알지만 마음으로는 믿어보고 싶은 낭만. 요즘엔 평범한 사람에게 로맨스만큼 기적 같은 일이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