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힘들 땐 대체로 감성 짙은 한국 드라마를 찾게 된다. 느리고 묵직하게 감정을 위로해주는 맛이 좋다. 한과 정을 마구마구 느끼며 같이 울고 싶다.
넷플릭스에 떠서 다시 눈에 든 이 드라마도 그렇다. 마음 아픈 감정선 뿐 아니라 음악도 화면도 전개도 인물들도 썩 좋다. 방영 당시 혹평을 많이 들어서 그냥 유치한 드라마라는 생각만 있었는데, 2020년 여름 다시 보니 참 좋다. OTT를 매개로 묻힌 드라마들 재평가가 활발해졌으면 좋겠다.
[해수의 반짝이는 마음]
뭘 모를 때 제일 용감하다고, 처음 고려에 떨어진 해수는 발랄하다. 아무 계산 없이 해맑음으로 황궁을 휘저어놓는다. 어차피 별 볼일 없던 21세기 인생, 여기서 인생 2회차 한 번 잘 살아보자 싶다. 자신을 지켜주는 가족들도 있고 천만다행으로 특기인 화장술도 써먹을 수 있으니 굶어 죽지도 않겠고! 그러나 황궁은 현실이었다. 해수는 서서히 그 무게에 짓눌리기 시작한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하고, 마음을 준 이들이 죽고, 자신도 고문을 당하며 표정을 잃어간다. 마음만 있다고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모진 현실 속에서도 해수는 사람의 진심을 포착하려 애쓴다. 동생으로 여기며 붙어다녔던 채령이가 사실은 자신의 스파이였음이 밝혀졌을 때, 어쩔 수 없었을 그녀의 마음을 헤아렸다. 왕소가 미래의 피의 군주란 사실을 깨닫고도 두려움을 추스르고 자신이 바꾸리라 다짐했다. 해수는 제 때 진심을 말하기만 하면 품어주는 사람이었다. 소문이나 추측보다는 자신의 눈으로 사람을 믿었다. 그러니 왕욱의 흑화하는 과정을 보면서도 끝까지 그에게 직접 물었다. 한 번이라도 자신을 보고싶어했느냐고.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이 좋았다. 자신에게 마음을 품은 황자들 사이에서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하려다 보니 결국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그리움 때문에 몸을 상하게 하진 마시라'며 남은 이를 챙겼다. (해수가 어장관리녀라고 하는데, 사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죄밖에 더 있나 싶다... 중간에 노선을 틀긴 했지만 명확한 이유도 있었고...)
[해수와 오상궁의 선후배 관계]
개인적인 취향인지 몰라도 선후배 관계, 특히 내리사랑을 좋아한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연대감, 자신의 막막했던 처음을 떠올리며 댓가를 바라지 않고 측은지심으로 신경써주는 마음이 따뜻하다. 오상궁은 유독 해수를 나무란다. 억울한 해수가 왜 자기만 미워하냐고 되받아치자 오상궁은 말한다. 널 보면 나 같으니까! 사람을 쉽게 믿고 모든 걸 퍼주고 배신당하니까! 매순간 경계해야해. 살얼음판 걷듯 그리 살아야해. 오상궁이 해수대신 분노해 황실 사내의 배신에 치를 떠는 게 좋았다. 자신이 이미 걸어 온 길을 걷는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 좋았다.
[해수X왕소의 로맨스]
해수의 사랑이 인간적인 짠함이 묻은 사랑이라 좋았다. 내가 널 가지겠다, 널 어떻게 해보겠다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인드다. 왕소 역시 '내 것이다'거리긴 하지만 수의 마음을 존중했기에 석고대죄 하는 해수의 옆에서 함께 비를 맞았다. 왕욱은 해수와 고려, 그리고 가족을 전부 가지기 위해 전략적으로 해수를 외면했지만 왕소는 해수가 전부였기에 옆에 섰다. 결국 수는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소에게 마음을 연다.
여기서 잠깐 느껴지는 로코의 향기.
-왕소는 자신의 상처(얼굴)를 해수에게만 들킨다
-왕소는 해수에게 ’네 눈이 미치게 싫다’며 격한 부정을 한다
-왕소는 항상 마음이 무겁고 심각한데 해수는 장난과 농담으로 다가온다
[8명 중 역사 속 광종을 찾아야 하는 추리]
8명의 황자가 도태되지 않고 골고루 쓰이는 편이다. 처음에 해수가 황자들과 각자 다른 계기로 가까워지는 것도 다채로워서 재밌었다. 주변 인물 서사도 비중있게 잘 활용했다. 은 황자-순덕 이야기도 그렇고. 백아-우희도 그렇고. 다들 이야기 깊숙이 참여시켜서 정 들게 만들었다. 그들 때문에 큰 사건이 하나씩 터지고 국면이 바뀐다. 수많은 인물들 사이에서 플롯 라인 중 하나가 8명의 황자 중 누가 광종이냐 하는 추리였다. 드라마에선 사실 추리랄 것도 없었지만 만약 이 부분을 단단하게 살렸다면 훨씬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 같다. 또 단지 수가 황자들을 아껴서 그들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광종을 찾아야 하는거라, 동기가 좀 약한 것 같다. 그보다 뭔가 자신의 가문이라든지 자신에게 얽힌 사연이 있었다면 더 와닿았을 것 같다.
[설득력 부족한 황후유씨]
생각해보면 악역들도 다 짠한 구석이 있다. 특히 흑화한 왕욱은 비뚤어져서라도 수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힘을 가져야만 자신이 아끼는 것들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황후만은 왜 그렇게 소를 밀어내려 했는지에 대한 설득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아무리 어렸을 때 그런 일이 있었어도....
[너무 도식적?]
마지막에 가면서 패턴이 반복돼서 갑자기 코미디가 됐다. 이 사람 저 사람 다 죽으니까 슬프기보단 웃겼다. 또 정이가 해수랑 혼인하겠다 하니까 왕소가 조르르가서 해수한테 물어보고 욱이도 해수와 혼인을 약조했다하니까 또 쪼르르 가서 사실이냐 묻고 뭔가 상황은 분노+심각한데... 다 해수랑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소꿉장난같아서 웃겼다. 정이까지 가세하는 건 작위적이었다. 이전까지의 감정선이 아까웠다.
사극은 애타고 절절한 맛이 있어서 좋다. 이렇게 된 이상 장옥정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