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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Oct 30. 2022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리뷰

인생의 흐름을 따라오다보니 이곳에.

 고양시에는 도서관이 많습니다. 과장을 좀 보태면 역마다 있는 것 같아요. 덕분에 저도 책을 원 없이 읽고 있습니다. 고양시도서관에서 통합 회원을 신청하면, 전자책을 대여할 수 있는 전자도서관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파타고니아의 창업자 이본 쉬나드의 저서 <파도가 칠 땐 서핑을>을 읽고 나니 심심했어요. 고양시 전자도서관 앱에 들어가 인문학 탭을 누른 뒤 무작정 스크롤을 내렸습니다. 눈에 이 책이 꽂혔습니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천문학자인데 별을 보지 않는다고?! 천문학자란 별을 보는 직업이 아니던가. 호기심에 제목을 터치했습니다. 저자 소개와 소개글이 먼저 보였습니다. 저자인 심채경 박사는 달 연구를 하는 박사 후 연구원입니다. 2019년 저명한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에 젊은 달 연구자로서 인터뷰한 경험이 있는 분입니다. 목차를 봤어요. 서문이 끌리더라고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바로 대여 버튼을 눌렀습니다. 서문을 읽다가 이 책을 전자책으로만 보기엔 아깝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길에 바로 역 근처의 스마트 도서관에서 실물 도서를 빌렸습니다.


"모두가 보고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애쓰며 점 두 개를 칠판에 찍고는 돌아서서 이토록 흥미진진한 것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던 그 순간, 무미건조한 중년 아저씨의 눈에서 반짝, 소년이 지나갔다. 술이나 산해진미도 아니고, 복권 당첨도 아닌데. 하다못해 아름다운 '연주씨'를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연주시차. 지난 십몇 년 동안 한 해에 예닐곱 반에서 똑같은 설명을 했을 텐데 어째서 연주시차 따위가 저 사람을 그리 즐겁게 하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일 년 뒤, 나는 지구과학 경시대회에 나가서 어쭙잖은 상을 탔다."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프롤로그의 문장들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당장 제 옆에도 있어요. 저희 남편은 사진을 정말 좋아해요. 마니아예요. 카메라와 렌즈의 종류는 물론, 어떤 필름으로 찍었는지까지 맞춰요. 평소엔 말수가 적은데 카메라 얘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며 이런저런 설명을 합니다. 몇 년을 듣다 보니 얼추 이 단어가 무슨 뜻이겠구나. 하는 눈치가 생겼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사진 찍는 것도 정말 좋아합니다. 커머셜 촬영과는 별개로 출사도 자주 다닙니다. 몇 해 전 한파가 심하게 왔을 땐 한강이 언 사진을 찍어야겠다며 몇 시간 동안 칼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녔어요. 그때 동상 안 걸린 게 다행일 정도로요.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자주 그의 피사체가 되는 행운을 누리는데요, 그때마다 그의 얼굴에 찐 행복이 피어나는 걸 보면, 저도 어쩔 수 없나 봐요. 한 여름의 땡볕 아래서, 매서운 한파가 몰아지는 빌딩 숲 사이에서 그가 원하는 컷을 얻을 때까지 불평 없이 포즈를 취하니까요.

 평일 밤과 주말 새벽, 일주일에 두 번 축구를 하기 위해 집안일과 아이들 방과 후 학원 보내기 등 철인 3종 경기 집안일 버전을 해내는 직장 동료분. 철학을 해석하는 걸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서점 대표님 등 주변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아 감사한 마음입니다.


 프롤로그에서는 저자가 지구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담고 있다면, 1부 '대학의 비정규직 행성과학자'는 심채경 박사의 학부 시절부터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까지의 내용입니다. 자서전처럼 거창하지 않습니다. 친한 언니의 블로그를 보는 기분이었달까요.


“처음부터 타이탄을 하고 싶었어요? 질문을 듣고 한참을 생각해보았지만, 이렇다 할 계기가 없었다. 난 어릴 때부터 '서른 살 즈음에는 외제차를 타고 고층 오피스텔에 살며 매일 정장을 빼 입고 다니는 직장인이 되어 있겠지' 같은 허상 말고는 별다른 목표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저 오늘 할 일 오늘 하면서 사는 타입이다. 그게 잘 안 될 때도 많지만, 그러려고 노력은 한다. 그러니 내가 '타이탄 전문가가 되고야 말겠어! 하는 다짐 같은 걸 했을 리 없다. 어쩌다보니 '행성방이라 불리는 연구실에 들어갔고, 어쩌다보니 아무도 손댄 적 없는 타이탄 관측자료가 내 손에 쥐였을 뿐이다. 어쩌면 한 번도 선택된 적이 없었기에, 오히려 더 절대적인 연구 주제가 되었달까.


 첫 회사의 팀장님과 선배들이 이 질문을 했습니다.  

"광고를 하고 싶은 이유가 뭐야? “

"재밌어서요."

 제 대답을 듣고 나면 절반은 고작 그런 이유로 신성한 광고를?이라는 표정을, 절반은 넌 얼마 못 가겠다. 는 표정을 지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광고 새내기의 풋풋한 포부를 듣고 싶어서 질문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꿈이 자주 바뀌었어요. 매년 되고 싶은 게 달랐거든요. 사진작가이셨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사진을 업으로 삼으려던 때도 있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과연 내가 이 무거운 카메라와 삼각대와 필터와 반사판과 조명을 갖고 다닐 수 있을까? 그렇게 사진은 취미의 영역으로 남았습니다.

 내가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숙고했습니다. 질리지 않고 좋아하는 것. 마치 지구의 중력에 끌려들어 가, 궤도를 그리는 달처럼 살아갈 수 있는 일. 제가 내린 답은 글쓰기였습니다. 다양한 글쓰기가 있지만, 짧고 여러 분야를 배울 수 있을 것. 그렇게 해서 광고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광고는 하루에 8시간, 대부분 그것보다 넘게 일해도 ‘즐겁게 몰두할' 수 있었어요. 브랜드나 서비스를 탐구하고, 나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거든요.

 저도 ‘어쩌다보니’ 글을 선택했고, ‘어쩌다보니’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저자와 내적 친밀을 쌓으며, 2부로 넘어갔습니다. ‘이과형 인간입니다’라는 제목과 달리 문과 감성이 충만한 챕터였습니다. 박사 심채경과 여성이자 엄마인 심채경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어요.


연구실에 홀로 남아 연구에 집중하는 밤은 정말이지 근사하다. 누군가로부터 전화도 걸려오지 않고, 누군 가 찾아오지도 않으며,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는 일을 잊어도 되는 밤. 한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한 가지 주제에 오롯이 집중해 화장실 가는 것도 잊는 그런 밤. 어떤 사람의 직업은 정해진 '시간'을 성실히 채우는 일이고, 또다른 사람의 직업은 어떤 '분량'을 정해진 만큼 혹은 그에 넘치게 해내는 것이라면, 나의 직업은 어떤 주제에 골몰하는 일이다. 하나를 들여다봐도 이건 왜 그런지, 저건 왜 그런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


한 단계 전진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주 즐거운 시간이다.


 연구와 광고의 속력은 굉장히 다릅니다. 연구는 끈질기게 파고들어야 하죠. 공전 주기가 느린 명왕성 같아요. 모든 길을 꼼꼼하게 걷습니다. 광고는 빨라요. 무작정 빠르기만 하면 안 됩니다. ‘아는 사람의 모르는 이야기’ 같은 포인트가 있어야 하죠. 마치 금성 같달까. 금성은 공전 주기가 빠르기도 하지만,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공전 방향이 다른 행성이거든요.

 업이 달라도 즐거움을 느끼는 지점은 같다는 걸 느꼈습니다. 일의 속력이 빨라서, 늘 지나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고, 그 시간과 노력이 자양분이 됐구나. 하는 것을요.


“보이저는 창백한 푸른 점을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원래대로 기수를 돌렸다. 더 멀리, 통신도 닿지 않고 누구의 지령 도 받지 않는 곳으로, 보이저는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전진할 것이다.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나 자립하는 순간을, 보이저 호에 비유한 것에 눈길이 갔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아마 같은 기분이었겠죠?


 3부 ‘아주 짧은 천문학 수업’ 4부 '우리는 모두 태양계 사람들'은 천체 관측에 관한 내용이자, 저자 본인의 삶을 돌아보는 챕터입니다.


“그렇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달의 위상 변화'는 북반구 전용이다. (중략)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규정한 것이다. 하늘의 달도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


“내가 고요히 머무는 가운데 지구는 휙, 휙, 빠르게 돈다. 한 시간에 15도, 그것은 절대로 멈춰 있지 않는 속도다. “


“밤도 흐르는데, 계절도 흐르겠지. 나도 이렇게 매 순간 살아 움직이며, 인생을 따라 한없이 흘러가겠지. 내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도 밤은 흐르고 계절은 지나간다. (중략) 여름밤의 돌고래가 말을 걸어올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우리는 아주 빠르게 나아가는 중이라고, 잠시 멈췄대도, 다 괜찮다고. “


 사람은 행성 같아요. 소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티끌도 어떤 땐 지구에 영향을 주는데.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달의 크레이터 같은 상처가 남는구나. 상처지만, 자양분을 남겼구나. 생각합니다. 연차가 쌓일수록 저마다 규정한 세계가 다르다는 것이 피부에 와닿거든요. 이 사람의 입장에선 그렇게 보였겠구나. 저 사람은 이런 의미에서 그 말을 했겠구나. 하는 것들이요. 읽으면서 고개를 가장 많이 끄덕였던 챕터였습니다. 위안을 받았거든요. 4부도 마찬가지예요.


"그에게 한 번 더 물었다. 그와 나의 공동연구자 중에는 옛 소련에서부터 활동해왔던, 지금은 우크라이나인이 된 원로 과학자가 있다. 우주경쟁시대 초반에는 소련이 늘 미국보다 한발 앞서나갔는데 아폴로 우주인의 달 착륙으로 인해 상황이 역전되었을 때, 그때도 달 과학자였던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그 얘기라면 이미 나눠본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사람을 달에 보내서 기뻤다고 했단다. '우리'는 미국인도, 미항공우주국 관계자도 아닌, 인류 전체였다.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중략)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학위논문을 쓸 무렵에는 교수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선배들도 그렇게 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 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나'가 아니라 '우리'로 일하는 것. 광고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 혼자만 잘한다고,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느껴져요. 아무리 좋은 글을 써도, 브런치 같은 플랫폼이 없으면 글을 보여줄 수가 없는 것처럼요. 비대면 심리상담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열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계절이 멀어지고 또다시 돌아오는 시간 중 대부분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이 '뭐라도' 되었을 무렵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소모되었다. 그렇게 무척 쓸모없었고 대단히 중요했던 열 계절을 기꺼이 맞이한 끝에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다. 이 한 권의 책에는 작은 구두점이지만, 어느 별 볼 일 없는 천문학자에게는 또하나의 우주가 시작되는 거대한 도약점이다."


 책을 읽기 전엔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모호했어요. 완독하고 나니, 이처럼 목적에 부합하는 문장을 써내다니! 하고 감탄했습니다. 브런치 북을 발행하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었거든요. 저자인 심채경 박사가 연구자이기 때문일까요? 의외의 분야에서 한 수 배웠습니다. "누구에게나 각자 인생의 흐름이 있고, 나는 삶을 따라 흘러 다니며 살다 보니 지금 이러고 있다." 생각해보면 저도 거창한 목표가 있다기보다는, 보이는 길을 따라오니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빨리 성장해야겠다는 마음 대신, 나는 누구이며 이 문장은 어떤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 것인가. 에 더 많은 고민을 해야겠습니다.


 좋은 글은 분야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통찰력이 주는 울림이 있거든요. 고등학생, 혹은 이 길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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