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가장 기대되는 신예 작가를 만날 수 있는 앤솔러지 시리즈 ‘내러티브온’의 세 번째 책 <구도가 만든 숲>을 읽었습니다. 2022년 내러티브온에 참여한 작가는 총 여덟 분입니다. 나인경, 서계수, 유영은, 이하진, 임현석, 전하영, 최미래, 그리고 함윤의 작가가 주인공이죠. ’ 작가들은 8편의 이야기로, 전염병이 일상화되고 구조적 모순이 개인을 옥죄는 이 시대에 불안과 공허를 치유할 구원의 빛을 찾습니다.‘라고 하는군요.
책은 여덟 편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의 제목이자 첫 챕터인 <구도가 만든 숲>은 자신이 사랑했던 공간을 복원하려는 ‘구도’를, <자개장의 용도>에서는 주인공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 외로운 궤도 위에서>는 사회의 부조리를 돌파하려는 여성의 이야기가 판타지와 SF적인 상상력과 함께 드러납니다. <시차와 시대착오>는 아버지와 딸 간의 세대차이와 지금의 사회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슬픔을 그린 <시티 라이트>, <백허그 공모전>, 신념에 관한 의문을 던지는 <프로메테우스의 여자들>, 일상의 단편을 보여준 <어쨌든 지금은 여름>까지. 사회를 바라보는 여덟 가지의 관점이 한 권에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구도가 만든 숲>과 <자개장의 용도>를 가장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구도가 만든 숲>은 구도의 인생관에 감명을 받았거든요.
구도는 6년 전, 이모의 냉면 가게에서 나와 두 달 동안 아르바이트했던 학생입니다. 그가 고향으로 내려가고, 연락이 끊어졌죠. 어느 날 구도는 이모가 잘 계시냐며 연락을 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지 몇 년이나 됐지만, 구도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서울로 올라옵니다. 플라스틱 통과 작은 모종삽과 함께요.
구도는 자신이 좋아했던 숲을 복원하려고 합니다. 작은 인공 숲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이모가 좋아했던 용화 가든의 흙을 담으러 갑니다. 하지만 겨울이라 땅은 꽁꽁 얼어있는 데다 삽 또한 약해서 가져온 플라스틱 통을 다 채우지 못하죠. ‘나’는 구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다시 읽어보니, 구도는 행복한 기억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에 용화 가든에 간 것 같았습니다.
다만 하루하루 끌려가듯 산 게 후회된다고
구도는 말했다. (중략)
나쁜 태도였다고 생각해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지레 단정하고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이제는 그렇게 안 살 거예요.
-p.26
관성대로 살다 보면, 바꿀 수 있는 일도 그냥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뒤돌아봤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린 게 부끄럽더라고요. 아마 구도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더 늦기 전에 좋아했던 숲을 복원하기로 했으니까요. 용화 가든의 흙처럼,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것들로 채워가면서요.
누군가에겐 그 숲이 일기장이나 사진, 혹은 인스타그램 피드가 될 수도 있겠죠. 제가 복원하고 싶은 숲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곳의 절반은 송호리의 소나무와 완두콩 같던 자갈이 깔려있을 것 같아요. 나머지 절반은 지금을 살아가면서 채워 넣고 싶습니다.
<구도가 만든 숲>이 있었던 장소를 복원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자개장의 용도>는 있었던 장소를 떠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가고 싶은 곳을 어디든 갈 수 있는 옷장을 물려받았습니다. 외할머니 때부터 써온 자개장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자력으로 돌아올 수 있을 곳까지만 갈 것.’ 사실 이 규칙은 주인공의 엄마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선택을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슬리퍼 끈이 떨어질 때까지 걷기로요.
옷장을 통해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는 개념이 좋았습니다. 갑자기 어렸을 적 생각이 났어요. 저희 외할머니 집에도 자개장이 있었거든요. 그곳에 들어가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다른 세계로 가는 상상도 자주 하곤 했어요. 그때마다 엄마는 멀리 가지 말아라. 고 하셨습니다. 결혼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중이라 그런 걸까요? 요 며칠 엄마의 전화에 애틋함이 묻어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끈이 튼튼한 슬리퍼’를 신고 자주 찾아갈테니 말이에요.
여자는 자신이 집으로부터 아주 멀리 왔으며, 이제 앞에 놓인 길은
한 갈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는 말했다.
나는 선택했어.
그래서 너희를 만난 거야
-p.72
<프로메테우스의 여자들>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흠칫했거든요.
그러나 연소의 눈엔 보였다.
프로메테우스의 얼굴이 고통에 물든 것을.
그가 간신히 비명을 참고 있는 것을
인간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추기경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어차피 죽지 않습니다.
죄책감 따위 느끼지 마세요.
저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연소의 머리를 쳤다.
이 사람, 다 알고 있었구나.
창이 무겁고 갑옷이 무거웠다.
-p.270
신념을 위해서라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거창한 신념이 아니더라도요. 진실을 알았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라는 큰 질문을 던졌던 단편이었어요.
여기에 소개하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의 단면을 포착한 소설들. 상상력 가득한 단편 소설도 있었습니다. 출퇴근 길에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