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님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다들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갑작스레 몰린 프로젝트에 철야하느라 브런치에 자주 들리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일찍 퇴근한 어느 저녁,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두 명이 있었습니다.
“야, 이건 공정하지 않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공정한데?"
갑자기 ‘공정‘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히더라고요. 공평은 자주 들어왔는데, 한 단계 높은 개념인 공정이 일상어가 되었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부모의 능력과 재력에 따라 장래가 결정된다는 ‘수저 계급론', 부정 채용 비리 등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로 공정성이 대두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까지 ‘공정성’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정희원 애리조나 주립대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는, 첫 단독 저서 『공정 이후의 세계』에서 그 원인을 분석합니다. 책은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여성할당제, ‘이대남’ 논란 등 익숙한 사례를 통해 젊은 세대의 공정 요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공정이 어떻게 능력주의와 만나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고 누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지 치밀하게 분석함과 더불어 공정 담론에 함축된 구조적 맥락과 사상적 배경은 물론 더 나아가 소모적인 공정 논란을 넘어서는 대안적 비전을 제시합니다.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에서는 「공정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타이틀로 개별주의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 공정이라는 시대정신을 분석합니다. 공정을 외치는 이들의 내면엔 억울함, '내 것이어야 하는데 뺏겼다'는 박탈감이 있다는 것이죠. 2부는 「다시 쓰는 정의론」으로, 관계적 존재론에 기반한 정의 개념을 돌봄, 보편, 조직과 노동, 그리고 사회 변혁 등의 측면에서 제시하였습니다. ‘개별주의적 존재론’이니, ‘정의론' 같은 단어에 좌절하지 마세요. 어려운 용어는 해설이 친절하게 되어있고, 사회를 분석하는 내용 또한 쉽게 설명이 되어있으니까요.
『공정 이후의 세계』의 1부는 트렌드 리포트처럼 읽었어요. 아, 이런 현상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구나. 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모든 챕터에 밑줄을 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부의 3장 '“능력주의는 허구"라고 말한다는 것의 의미'와 2부의 5장 ‘모두를 위한 돌봄: 두려움 없이 연대하는 나 그리고 우리’였습니다. 제 관심사인 일과 가장 맞닿아 있었거든요.
주변을 둘러보면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싶은지'를 찾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사회에 나와보니 연봉, 복리후생만큼 일을 하는 의미가 중요한 줄 몰랐다면서요. 저자는 말합니다. “왜 의사가 되고 싶은 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일의 가치와 의미에 중심을 두고 역량을 기르기보다는 경쟁과 시험에서 우위를 정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라고요. 그렇기에 “앞으로의 삶에서 실현하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볼 시간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번아웃이 와도 본인 탓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조절하지 못해서, 내가 못해서 번아웃이 온 거라고요.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었거든요.
번아웃은 3가지 증상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탈진입니다.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고갈될 정도로 오랫동안 부담 요소에 노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신체적, 정서적, 인지적인 영역 모두에서 극도의 피로와 압박을 느끼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다음은 예전만큼 일에 마음이 가지 않거나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하고 싶은지 자문하는 상태인 분리. 마지막으로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부정적 감정이 생기는 냉소, 직장 내 대인관계와 소통 및 직업 성취도가 낮아지는 효능감 상실입니다.
번아웃이 와도 삶의 발걸음을 계속 옮기는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당장 내 옆에 앉은 동료도, 나의 친한 친구도 아픔을 조금도 내색하지 못하고 묵묵히 스스로를 몰아붙입니다. “아프지 않으니 그건 번아웃이 아니라, 그냥 일하기 싫은 거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즘같이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번아웃은 피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 1년 정도, 저는 탈진과 분리 상태를 겪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줄도 몰랐어요. 쉴 새 없이 바빴거든요. 그러다가 여유가 생긴 7월쯤부터 몸이 힘들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자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효능감 상실도 경험했고요. 온전히 제 문제 같았습니다. 내가 이 직장에 마음이 떠서, 일하기 싫어서.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보인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자기 의심을 했습니다. 의심은 퍼포먼스에서 드러났고요. 그 와중에 아래의 구절을 만났습니다.
번아웃은 단지 과로와 일중독의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신체적 질병이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실은 업무량이 그다지 많지 않아도
우리는 일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번아웃인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럴 때면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 괴로워진다.
p.116
번아웃은 나의 내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번아웃은 나와 내 일의 관계, 나와 내 일터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즉, 내가 구조와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다.
p.120
제가 회사에 원한 것은 피드백이었습니다. 저는 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동료와 상사의 피드백이 간절했습니다. 저희 회사 동료들은 배울 점이 많거든요. 제 몫 이상을 해내는 분들이 계신 곳이라 저도 그만큼의 역할을 해내고 싶었습니다.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데다, 피드백을 받기 어려웠던 터라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마음 한 편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다들 일이 바쁜 데다, 누군가에게 피드백을 준다는 게 부담스럽잖아요. 이 챕터를 읽으면서 다시금 위안을 받고 연대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집들이 온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꺼냈어요. 사실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들 번아웃을 경험했거나 번아웃 상태에 있었더라고요.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해결 방법을 찾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으로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회사 동료분들께 말씀드렸어요. 사실 회사 분들께는 제 상태를 말하면서도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다들 열심히 하는 분위기에 내가 찬물을 끼얹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런데 다들 내 일처럼 걱정해주고, 피드백을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번아웃을 서서히 극복하는 중입니다.
『공정 이후의 세계』를 읽고, 일에 대한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번아웃은 과로해야지만 오는 거야! 번아웃은 나약해서 오는 거야. 나만 잘하면 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어떤 문제든 개인만의 문제는 없습니다. 개인과 그를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에 관련된 내용에 집중하여 읽었지만, 다른 분들께는 '공정'에 관한 내용이 더 와닿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하기 쉬운 책이에요. 지금의 사회는 어떤 맥락을 담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명쾌하게 풀어낸 책입니다. 두께도 얇아서 몇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 사회 현상에 대해 알고 싶다. 혹은 직장 내에서의 고민이 있는 분이라면 꼭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래는 밑줄 친 내용을 발췌한 사진들입니다. 글에 들어간 구절도 있고, 구성 상 넣지 않은 구절들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