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대행사를 다니면 경쟁 입찰(비딩)에 종종 들어간다. 새로운 분야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다. 환영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힘들다. 비딩이 있어도 루틴 한 일도 계속 돌아간다. 즉, 정시 퇴근은 못하게 된다는 뜻. 지난 두 주 동안 그랬다. 고정 광고주의 카피를 쓰는 일과 비딩 건이 동시에 들어왔다. 일과 시간에 한 프로젝트를 얼추 끝내놓고,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잠깐 바깥바람을 쐬고 다시, 출근하는 마음으로 비딩 준비를 했다.
RFP(입찰 제안서)를 다시 열어 보니 마음이 놓였다. 광고주가 원하는 바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티브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기회. 기깔나는 인사이트를 뽑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겼다. 아직 진행 중인 프로젝트라 내용을 상세히 밝히기가 어렵지만, 인사이트를 뽑기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었다. 경험해보지 못했고, 주변에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다. 결국, 남의 이야기를 찾는 것보다 내가 해당 분야에 가졌던 의문을 생각해 보았다. 의외로 인사이트가 술술 나왔다. 래퍼 아웃사이더가 속사포 랩을 하듯,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을 페이지에 쏟아내었다. 뒷자리 동료가 비 오는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타자를 빨리 쳤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방향이 세 갈래로 나눠졌다. 선배님에게 전화를 드려 방향성을 말씀드린 뒤 안을 짰다. 의외로 쉽게, 빨리 썼다. 원래는 몇 시간 고민해야 나오는 게 카피 아니었던가. -다른 카피라이터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마치 거실 불 켜는 것처럼. 빨리 써졌다. 그러고 나니 ”연차가 해결해 줄 거야. “라는 말이 떠올랐다.
매년 봄을 탔다. 커리어적으로. 얼마나 성장했지? 그대로인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며 우울감이 들곤 했다. 올해도 작년과 별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비딩처럼 내 능력을 시험해 볼 만한 이벤트가 없던 탓이다. 동료들이나 선배, 팀장님께 피드백을 달라고 하면 모두 다 “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사실 100% 믿지 않았다. 퇴사를 막으려고, 혹은 사람 좋아 보이려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A 선배에게 커피 한 잔 하자고 했다. 그 선배와는 다른 비딩 건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똑같이 네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압축되고 강렬한 안들만 쏙쏙 가져왔다. 커피를 마시며 연쇄 질문을 던졌다. 선배가 말했다. “이 한 마디로 해결이 될 것 같네. 연차가 해결해 줄 거야. 대신 지금하는 것처럼 계속 노력해야 돼.” 그땐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썰을 더 잘 풀게 된다는 건가? 아니면 먹히는 공식이라고 깨닫게 되는 건가?
이번 비딩을 하며 그 말에 숨겨진 뜻을 알게 되었다. 연차가 쌓인다는 건, 그만큼 퇴고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예전엔 네 시간 걸려서 할 일을 두 시간이면 할 수 있게 된다. 남은 두 시간은 안을 다각도에서 생각하는 데 쓴다. 이 말이 맞는지, 앞단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는지.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니 내가 봐도 내 안이 그럴싸해 보였다. 대망의 아이디어 회의 날. 다행히 선배 카피라이터가 칭찬을 했다. “좋은 인사이트 많이 가져왔네. 안도 이 정도면 괜찮아. “ 그동안 새벽 퇴근했던 보람이 있었다. 더불어, 한 단계 성장했구나. 를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경쟁 입찰에서 우리 회사가 그 프로젝트를 따냈으니! 더욱 뿌듯했다. ‘2023년 가장 행복한 순간 10’에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말이다.
경쟁 입찰이 되면 끝? 아니, 시작이다. 수능처럼. 광고주와 회의를 통해 안을 수정한다. 더 좋은 안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수정할 수 있다. 다만, 머리를 쥐어짜 내는 그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것. 다행히 이번엔 큰 수정은 없었다. 안을 설명하는 논리와 상황 정도를 다시 찾으면 됐다. 어떻게 보면 안을 새로 짜는 것이기도 한데, 그래도 이전보다 들여야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다른 방향으로도 풀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아쉬웠다. 또 회의. 인사이트는 내가 가져온 걸로, 안은 선배님이 풀어온 걸로 결정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능력 있는 사람들의 크리에이티브를 보고, 죽을 듯이 고민하고, 고치다 보면 연차가 쌓이겠지. 그때도 안을 짜는 건 힘들겠지만 퇴고하는 시간, 그러니까 안을 더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질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퇴근 후 집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며 이렇게 말하겠지. “이 맛에 광고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