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를 조금 넘겨 퇴근한 날. 3호선 구파발행 열차를 보내고, 대화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철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몇 정거장이 걸리나 세어보았다. 출발지는 구파발. 다섯 정거장이 나왔다. 세상에?! 고작 다섯 정거장 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나. 출근하기 무지 싫었나 보다, 생각했다. 기껏 해봐야 2호선으로 환승하는데 십 분인데, 그동안 어떻게 책도 읽고 글도 썼는지 의아했다. 3호선에서의 시간은 내 맘대로 흘러가는 걸까…
의문은 다음역에서 풀렸다. “이번 역은 종로 3가, 종로3가역입니다.” 순간,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탄 줄 알았다. 그렇다. 내가 열차를 탄 역은 구파발 역이 아닌 을지로 3가 역. 매일 아침 남편이 구파발까지 데려다주다 보니, 자연스레 ‘3호선을 타는 곳은 구파발 역’이라는 인식이 생겼나 보다. 그게 아니라면 야근성 치매가 분명하다. 지나야 할 지하철 정거장의 수가 한 자리에서 두 자리 수로 늘어났다. 힘이 쭉- 빠졌다. 어쩌겠어, 고양시에 사는 이상 감내해야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쳐진 상태로 지하철에서 내렸다. 우연하게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집 앞 지하철 역” “내려와” 내가 도착한 줄 어떻게 안 걸까? 텔레파시가 통했겠거니, 생각하고 차에 탔다.
세찬 비에도 벚꽃은 인사를 건넨다. 그냥 들어가기가 아쉬웠는지, 남편이 이 빗속레 산책을 가자고 한다. “비 오고 나면 벚꽃을 못 보잖아.” 춥고 배고팠지만 함께 벚꽃을 보러 가기로 했다. 아파트에 주차하고, 각자 우산을 쓰고 걸었다. 잡은 손 사이로 차가운 빗물이 흘렀다. 집에서 오 분 정도 걸으면 벚꽃 명소가 나온다. 비 오는 밤, 아무도 없는 곳, 우리 부부는 그곳에서 한참 사진을 찍었다. 점점 거세지는 비에 하늘이 더 어두워졌다. 야맹증이 있는 터라 플래시를 켜고 걸었다. “오와!” 남편의 감탄사에 주위를 둘러봤다. 시커먼 어둠과 벚나무의 그림자뿐이었다. “자기, 플래시 아까처럼 해봐요.” 그의 말대로 플래시를 바닥을 향해 비췄다. 오초 정도의 기다림 끝에 셔터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보여준 사진은, 그날의 우리만이 찍을 수 있는 것이었다.
추위 때문에 슬슬 지쳐가던 차, 새로운 동력이 생겼다. 여기저기 플래시를 비추며 사진을 찍었다. 몸이 으슬해져 집으로 돌아갔다. 밤 산책을 나간 지 꼭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라면 하나를 나눠먹으며 남편과 아까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비 오는 밤의 벚꽃이 좋아졌다. 유치하지만 이런 사진을 우리만 찍었을 거라는 생각과 맑은 날보다 더 환하게 빛나는 벚꽃을 본 것, 남편과의 추억이 하나 더 때문이다. ‘사람은 사소한 추억으로 살아간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두고두고 꺼내먹을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